[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오징어+참조기식혜+막걸리…“홍탁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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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8일 07시 00분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공현진 인근의 농로를 달리는 자전거. 비는 마치 장마철인 듯 퍼부어 이 사진이 촬영될 즈음엔 속옷까지 몽땅 젖었다, 왼쪽 끝 선두가 허영만 화백.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공현진 인근의 농로를 달리는 자전거. 비는 마치 장마철인 듯 퍼부어 이 사진이 촬영될 즈음엔 속옷까지 몽땅 젖었다, 왼쪽 끝 선두가 허영만 화백.
20. 양양~고성 (마지막 구간) <상>

2300km를 달려 이제 마지막 길
늦은 아침 물곰탕 맛에 실망
‘밥심으로 가자’ 밥 한공기 꾸역꾸역


갑자기 내린 폭우…미친 듯 논두렁 페달질
무심한 대장 허영만 화백은 ‘전진!’ 외쳐

거진항 못 미쳐 젓갈집서 막걸리 한잔
주인은 오징어·참조기식혜를 내놓고
난로보다 뜨거운 정…이 맛이 여행이다


‘길은 늘 앞으로 뻗어 있어서 지나온 길들은 쉽게 잊혀졌지만…, 길은 그 위를 걸음으로 디뎌서 가는 사람의 것이었고 가는 동안만의 것이어서 가고나면 길의 기억은 가물거려서 돌이켜 생각하기 어려웠다.’(김훈 ‘흑산’)

집단가출 자전거 해안선 전국일주 마지막 마디인 양양∼고성 구간. 강화도를 출발한 지 19개월 만에 최종 목적지 고성을 목전에 두고 속초를 향해 달리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작가 김훈의 말마따나 길 위에 나선 뒤 두 번째 봄을 맞은 이 순간, 지나온 길들의 풍경은 잊혀져 돌이키기 어려웠다. 남은 것은 순간순간, 점선으로 이어진 추억들…. 내달려오며 만든 추억들도 시간이 더 지나면 차츰 퇴색할 터. 출발점에서 앞에 놓인 길은 너무 길어 실감나지 않았고 우리는 늘 더 빨리, 더 멀리 달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이제 2300여km를 달려 남은 거리는 수십km. 지금 통과하는 길이 새삼 소중해졌다.

늦은 아침식사를 위해 들른 속초 청호동 한 식당의 물곰(곰치)탕은 실망스러웠다. 안타깝게도 물곰의 선도도 떨어지고, 게다가 화학조미료를 과도하게 쓴 탓인지 맑고 담백했던 옛 맛을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하루종일 달려야할 길을 앞둔 대원들은 일단 칼로리를 비축해둬야 한다는 본능에 따라 밥 한 공기를 우격다짐으로 다 비워냈다. 결국 힘은 밥에서 나오고, 먹은 만큼 달릴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한가롭게 밥투정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식사 후 동명항에서 스쿠버다이빙 숍을 운영하는 김규영 씨의 가게에 들렀다. 속초 토박이로 산악인이자 다이버인 김 씨는 2년 전 집단가출호의 전국일주 항해 당시 짙은 안개 속에 속초항에 입항하는 우리를 위해 보트를 몰고 마중 나와 좁고 얕아 위험한 청호동 아바이 마을의 수로를 무사히 통과하도록 도와줬던 은인. 김 씨는 서둘러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수프리모 원두를 골동품에 가까운 분쇄기로 사각사각 갈고 종이 필터에 거르는 동안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향이 우중충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다독여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 씨는 우리나라 원두커피 핸드 드리핑계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7번국도를 피해 들어선 고성군 향목리. 관동별곡 800리길의 일부이다. 바람은 차고 비는 퍼부어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니었다.
7번국도를 피해 들어선 고성군 향목리. 관동별곡 800리길의 일부이다. 바람은 차고 비는 퍼부어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니었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 영랑호를 왼쪽에 두고 고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청간, 아야진을 지날 때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송지호 해변길을 통과할 무렵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4월 바닷가의 봄비는 뼈에 사무치게 차가웠다. 장대비가 얼굴을 때리며 목덜미로 흘러들고 바퀴에서 튀어 오른 빗물은 엉덩이를 적셨다. 비를 피해 일단 길가 구멍가게 처마 밑으로 피신했으나 비는 쉽게 그칠 게 아니었다.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인 대원들은 비를 뚫고 계속 가야 할지, 아니면 비가 그칠 때까지 멈출 것인지를 논의했으나 의견은 팽팽했다. 이렇게 되면 대장의 뜻이 중요하다. 모두들 허영만 화백의 얼굴만 쳐다본다. 허 대장도 갈등이 되는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일기예보도 그렇고 어차피 오늘 안으로 그칠 비가 아니다. 이왕 젖었는데 좀 더 젖는 게 대수냐? 그냥 가자.”

비는 더 굵어졌고 비바람에 자극받은 바다는 큰 파도를 해변으로 허옇게 몰아붙이며 길길이 날뛴다. 비 오는 날 자동차 도로를 달리는 건 평소보다 더 위험해 공현진을 넘어 가진의 마을길과 해안 경작지의 둑길을 갈지자로 달렸다.

빗줄기가 워낙 거세니 기능성 방수복도 소용이 없다. 빗물은 옷감을 뚫고 침투하지는 못했으나 얼굴과 목덜미로 흘러들어 가슴과 등을 타고 온 몸을 적셨고 신발 속에도 물이 가득 차 페달링을 하느라 발에 힘을 줄 때마다 찌걱거린다.

비는 퍼붓듯 폭우로 변해 콧구멍으로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으로 호흡해야 했다. 그나마 빗물을 마시지 않기 위해서는 연신 푸∼우 하며 투레질을 해야 했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이 한겨울처럼 시려오고 감각이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지만 전국일주의 막판이라는 사실이 일종의 흥분제로 작용해 엔돌핀이 솟아나는지 인디언처럼 괴성을 지르며 길게 뻗은 농로를 경쟁적으로 질주한다. 누군가 우리의 이 꼴을 본다면 분명히 정상이 아닌 사람들로 볼 것이었지만 다행히(?) 날이 궂어 지나는 사람이 없다.

이쯤 되면 오히려 쉬는 것이 무서워진다. 움직이지 않으면 체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추위에 쫓긴 집단가출 자전거 대열은 쉼 없이 질주했지만 국도를 회피하느라 실제 전진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못했다. 진부령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드는 고성 북천강을, 봉호리와 송죽리를 잇는 동해대교로 건넜다. RPM을 높여 체온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달릴수록 몸에 닿는 바람도 강해져 찬비에 식은 몸은 좀처럼 다시 데워지지 않았다.

고성읍내에서 통일전망대로 이어지는 7번 국도변에는 젓갈이나 오징어 등 건어물을 파는 가게들이 자주 보이는데 때 아닌 폭우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긴 탓인지 대부분 문울 닫은 상태였다.

거진 못 미쳐 반암 해변 부근의 젓갈집에 들어섰다. 눈보라치는 산속을 헤매다 산장을 발견한 셈이어서 다짜고짜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니 연탄난로의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감싼다. 주인 할아버지는 비로 쫄딱 젖은 채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우리를 보고 놀랐으나 전국일주 중이며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길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대단하다며 수건을 건네주고 난로 옆에 의자를 놓아준다.

고향 속초에서 다이빙샵과 건어물상을 운영중인 김규영씨가 자전거 식객들에게 서빙할 커피를 내리고 있다. 김씨는 커피에 정통한 재야의 숨은 고수다.
고향 속초에서 다이빙샵과 건어물상을 운영중인 김규영씨가 자전거 식객들에게 서빙할 커피를 내리고 있다. 김씨는 커피에 정통한 재야의 숨은 고수다.

연탄난로를 거의 껴안다시피 했고 체온을 잃은 몸은 오들오들 떨렸으나 시간이 지나며 몸도 마음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거세 난로가 피워진 가게 안은 빗물 흐르는 유리창 너머 바깥과는 단절된, 완벽한 은신처였다.

“막걸리 한 잔 어때?”

자전거를 탈 때 음주는 절대 금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왠지 막걸리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상황. 막내 이진원과 김경민이 다시 빗속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 막걸리 두 병을 사왔고 할아버지는 오징어 몇 마리를 난로 위에 구웠다.

2년 전 강화도를 출발할 때 월곳을 지나 연미정에서 주막집 할머니의 두부부침과 함께 마셨던 막걸리 이후 이렇게 맛있는 막걸리는 처음이었다. 인심 좋은 할아버지는 오징어뿐 아니라 자신의 점심 반찬인 참조기식혜까지 내왔다. 가자미식혜와 같은 방법으로 삭힌 참조기 식혜는 단정하고 청량한 맛이 막걸리와 환상의 하모니를 이뤄 우리는 더욱 더 녹아내렸다.

글·사진|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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