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민화의 세계]서재 풍경을 그린 ‘책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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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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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를 메운 기물과 식물 속에 행복의 염원이

민화 ‘책거리’(작자 미상·19세기 말), 개인 소장, 종이에 채색, 61.6×107.5cm. 온갖 물품들을 덩어리째 표현함으로써 복잡하고 화려한 민가의 서재풍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민화 ‘책거리’(작자 미상·19세기 말), 개인 소장, 종이에 채색, 61.6×107.5cm. 온갖 물품들을 덩어리째 표현함으로써 복잡하고 화려한 민가의 서재풍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조는 역대 어느 왕보다 학문에 대한 열정을 뜨겁게 불태웠다. 184권 100책 분량으로 구성된 그의 문집 ‘홍재전서’가 그것을 대변한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했다. 정조 자신도 몇 차례 암살을 당할 뻔했다.

이 때문에 그는 무엇보다도 신하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왕으로서의 권위를 강력히 세우는 데 진력했다. 친위기관 성격의 학문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한 게 대표적 사례다. 게다가 과거를 통과한 신진 관료들을 직접 재교육하는 것에까지 관여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는 숙명적으로 해결해야 할 정치문제를 학문으로 풀어나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만큼 학문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는 얘기도 된다.

○ 왕권강화의 산물로 탄생한 책거리


서재의 풍경을 담은 책거리란 장르는 정조가 추진한 왕권강화 정책의 산물로 탄생했다. 책거리의 ‘거리’란 일거리, 이야깃거리, 먹을거리처럼 책을 비롯해 그와 관련된 주변 물건들을 함께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책거리 그림 중 책가, 즉 서가와 같은 가구 속에 이들을 배치한 그림을 ‘책가도(冊架圖)’라고 부른다.

정조는 자신이 아이디어를 낸 책거리를 궁중의 화원으로 하여금 제작하게 했다. 책거리에 대한 정조의 애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는 학문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책거리 병풍을 어좌(御座) 뒤에 보란 듯이 설치했다. 원래 어좌 뒤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두어 통치자의 권의를 과시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그런데도 책거리 병풍을 두었다는 것은 학문을 통해 왕권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다. 또 은근히 책거리를 원하는 자신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다른 그림을 그려낸 화원 신한평(풍속화로 유명한 신윤복의 아버지)과 이종현(책거리로 명성을 떨친 이형록의 할아버지)을 유배 보내기까지 했다.

당시 책거리로 가장 이름이 높았던 화가는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김홍도(金弘道·1745∼1805년 이후)였다. 기록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아쉽게도 그의 책거리 작품은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교적 활동시기가 가까운 장한종(張漢宗·1768∼1815)의 ‘책가도’(경기도박물관 소장)가 남아 있어 김홍도의 책거리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장한종의 작품은 걷어 올려진 노란 휘장 사이로 책가의 위용이 드러나 보이게 하는 극적인 구성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책가는 아랫단에 문갑이 달려 있고,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다. 그 안에는 책을 중심으로 도자기, 문방구, 과일, 꽃 등이 진열돼 있다. 그림은 당시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최신 화풍인 서양식 원근법과 음영법이 적용돼 입체적인 조형미까지 갖췄다.

‘책가도’(장한종·19세기 초), 경기도박물관 소장, 종이에 채색, 361.0×195.0cm. 현존 책거리 그림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궁중 서가의 정연하고 웅장한 면모를 보여준다.
‘책가도’(장한종·19세기 초), 경기도박물관 소장, 종이에 채색, 361.0×195.0cm. 현존 책거리 그림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궁중 서가의 정연하고 웅장한 면모를 보여준다.
○ 현대적인 감각 엿보이는 민화 책거리

19세기 유행한 민화 책거리에서는 정조가 모색했던 정치적 목적의 빛이 바랬다. 대신 다른 동기와 의미가 부여되면서 책거리는 거듭나게 됐다.

책은 더 이상 정치선전용 도구가 아니라 선비가 대접받는 사회에서 출세의 상징이 됐다. 기물들은 진기한 골동품이 아닌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바뀌었다. 또 민화는 궁중회화보다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구성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서가에 기물을 배치할 만큼 공간이 넉넉지 못한 민화에서는 점차 서가의 비중이 작아지고, 아예 책과 기물들을 하나의 장식 덩어리처럼 밀집시킨 구성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민화 ‘책거리’에는 책 외에 여러 가지 기물과 식물이 가득하다. 책갑들 주위로 두루마리, 주전자, 바구니, 술병, 필통, 향로, 모란꽃, 작약꽃, 연꽃, 오이, 참외, 수석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장한종의 책가도와 달리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용품과 식물이 많은 게 특징이다. 기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가야금이 마치 비녀처럼 질러져 있어 복잡함을 극대화한다.

여기서 기물과 생물은 저마다 의미하는 상징이 있다. 책과 문방구는 출세를 상징하고 작약과 모란은 행복을 뜻한다. 씨가 많은 오이와 참외는 다산(多産)을, 특히 다남(多男)을 염원하고 수석은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다. 요컨대 이 그림은 “사내아이를 많이 낳고, 그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출세를 하고, 행복을 누리며 장수하기를 기원한다”는 염원이 담긴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적 이미지임과 동시에 행복과 장수를 염원하는 길상의 상징인 것이다.

오늘날 책거리는 인기 있는 민화 중 하나다. 시렁으로 구획된 책거리의 면 분할과 구성은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네덜란드)의 추상화나 폴 세잔(1839∼1906·프랑스)의 정물화를 연상케 할 만큼 현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책거리는 매우 전통적 요소들을 고스란히 나타내면서도 현대적 특징까지 지닌 그림인 셈이다. 궁중의 정연한 서재든 민가의 어지럽혀진 서재든 그 조형적 아름다움은 시대를 넘나들며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책거리 특별전(3월 21일∼6월 10일)을 찾아 그 감동을 직접 맛보는 것은 어떨까.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한국민화학회 회장 chongpm@gju.ac.kr
#민화의세계#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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