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우린 1000년전 십자군 전쟁 때도 만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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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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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정찬 지음·344쪽/1만2000원·문학동네

시간적 배경은 2000년을 넘어 장대하게 흐른다. 그 내용은 어떤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선보이며 메시아로 추앙받던 시대, 1000년의 세월이 흘러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십자군전쟁 시대, 다시 1000년을 더해 걸프전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등이 벌어지는 현대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소설은 두 남자를 통해 종교 수호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인류의 잔혹사를 풀어낸다. 서로 다른 시대들을 꿰뚫는 키워드는 ‘환생’이다.

폴란드계 유대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종군기자로 2003년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를 공격하던 걸프전 현장에 들어간다. 이라크의 병원에서 만난 부상자인 ‘이브라힘’은 나에게 뜻 모를 얘기를 한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 만났습니다. 난 이집트의 기록관으로 당신은 십자군의 사제로….” ‘나’는 이브라힘의 말을 녹음하며 정체 없는 힘에 이끌린다. 소설의 시점은 과거 또 다른 잔혹한 살육 현장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은 ‘나’와 이브라힘의 전생과 현생을 오간다. 예수와 사랑을 나눴던 여인(이브라힘의 전생), 예수의 행적을 따라가는 십자군전쟁 시대의 사제(‘나’의 전생)와 기록관(이브라힘의 전생), 그리고 현재 이라크 전장에서 만난 ‘나’와 이브라힘. 작가는 결국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끔찍한 살육을 벌인다는 점에서 십자군전쟁과 걸프전은 같다고 말한다.

8년 전 장편 ‘빌라도의 예수’에서 예수의 일생을 빌라도의 관점으로 신선하게 풀어냈던 작가는 이번에는 죽음과 환생에 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여러 질문을 던진다. ‘불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석의 불가능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환생이라는 존재의 유랑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존재의 완성이고 구원이라면, 신의 역할과 충돌하게 된다.’

작가는 ‘나’의 어머니를 무속인으로 내세워 한국 토속신앙의 죽음과 환생까지 짚는다. 과거와 현재,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종교와 철학적 분석이 곳곳에 번뜩인다. 픽션이 가미된 종교나 철학 서적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깊은 사색의 발자국들이 책장 가득하다. 단, 예수 시대나 십자군전쟁 시대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을 소설화한 것이라 신선함이 덜하며, 환생을 주제로 했지만 전생이 현생에 영향을 주는 연결고리가 없어 구조가 헐거운 느낌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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