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천천히… 35년전 작품 속편 쓰고 있어요”

  • Array
  • 입력 2012년 3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 9년전 뇌중풍 ‘무진기행’ 김승옥 씨 등단 50년… 필담 인터뷰


《 소설가 김승옥(71)이 대학 노트를 꺼내 한 장을 찢었다. 돋보기안경을 꺼내 쓴 그는 볼펜으로 종이에 한 자 한 자 흘려 썼다. ‘무진기행’이라고 쓴 뒤 화살표를 긋고 ‘사랑’이라고 적었고, ‘광○문’이라고 썼다가 생각난 듯 ‘화’자를 마저 채워 넣었다. 간간이 “그래” “아니” 말도 했지만 대개는 웅얼거림에 가까웠다. 2003년 2월 뇌중풍이 찾아온 뒤 그의 말과 글은 생경하게 짧아져 있었다. ‘서울, 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장’ ‘무진기행’ 등을 발표하며 1960, 70년대 한국 소설의 새 지평을 연 그는 1980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먼지의 방’이 신군부의 검열로 삭제되자 절필을 선언했다. 이듬해 4월 자택에서 하느님을 직접 보는 영적인 경험을 했다며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된 후로는 창작과 멀어졌고 그의 문우와 독자들은 무척 아쉬워했다. 》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소설가 김승옥은 1964년 발표한 대표작 ‘무진기행’에 대해 “고2 때 경험한 첫사랑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라며 웃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소설가 김승옥은 1964년 발표한 대표작 ‘무진기행’에 대해 “고2 때 경험한 첫사랑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라며 웃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생명연습’이 당선돼 등단한 작가가 올해 등단 50년을 맞았다. 소설가 겸 시인 김도언(40)과 함께 5일 서울 홍익대 앞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김도언의 결혼식 주례를 김승옥이 맡았을 만큼 둘은 각별한 문학적 사제 간이다. 스승과의 필담에 익숙한 김도언이 ‘통역’을 해줬다. 기자의 질문에 김승옥은 단어 몇 개를 썼고, 김도언이 문장을 유추해 “이런 뜻이죠?”라고 되물으면 김승옥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방식으로 인터뷰는 더디게 진행됐다.

―소설을 발표하지 않은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출간을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문학에 대한 생각을 하고는 있었습니다.”

―기독교신자가 된 후로 작품을 볼 수 없어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괜찮습니다. 결국 다 똑같습니다. 소설은 결국 신과 악마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종교와 문학은 차이가 없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도 결국은 기독교 문학입니다.”

―일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전집 기획(열림원이 상반기 출간 예정)에 도움을 주셨지요.

“다자이 오사무는 유물론에 심취했다가 결국 신에 귀의한 작가입니다. 나와 공통점이 있지요. 당시 시대를 잘 이해하는 번역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원로 문인인 이호철, 전규태를 번역가로 추천했습니다.”

―집필을 하고 계십니까.

“중편 ‘서울의 달빛 0장’의 후속편을 쓰고 있고, 단편 ‘환상수첩’을 시나리오로 바꾸고 있습니다.”

1977년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서울의 달빛 0장’의 원제는 ‘서울의 달빛’이었다. 하지만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이 작품은 연작으로 쓰는 게 맞으니 0장을 붙이는 게 좋겠다”고 권해 제목을 바꿨다. 30년 넘어 후속편이 마련되는 셈이다.

―작업은 얼마나 하시는지요.

“오전 2시에 자서 7시나 8시에 일어납니다. 가끔 그림도 그립니다. 컴퓨터로 씁니다. 많게는 하루 12시간 합니다. 인터넷도 하니 글 쓰는 시간이 그만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 작품을 언제쯤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김승옥은 큰 목소리로 “천천히, 천천히”라고 말했다. ‘서두르지 않겠다는 뜻이냐’고 되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가 김도언과 김승옥(오른쪽).
소설가 김도언과 김승옥(오른쪽).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 차용되기도 했던 ‘무진기행’을 읽으면 습습한 안개가 가득한 무진에 가고 싶어진다. 김승옥은 첫사랑을 얘기했다.

“무진은 현실에는 없는 가상의 지역입니다. 제가 고2 때 한 살 연상의 여성을 사랑했지요. 무진기행은 그 여성과 결별한 뒤 제 첫사랑의 느낌을 모티브로 쓴 소설입니다. 제 고향인 순천이 배경이라면 배경이지요.”

기자가 “김도언 씨가 최근 시인으로 등단했다”고 전하자 김승옥은 “좋지, 좋지”라며 밝게 웃었다. “황순원과 김동리도 시를 썼다”며 후배의 도전을 응원했다.

김승옥은 1시간 반 동안 이어진 인터뷰의 대부분을 자신의 신앙과 선교 계획을 밝히는 데 할애했다. 특히 스리랑카에서 선교를 펼치고 싶다고 거듭 강조했다. 등단 50주년을 맞은 문단은 그를 기리는 책 출간과 낭송회 준비로 바쁘지만 김승옥은 문인보다는 신앙인의 삶에 애착이 커 보였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