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섹스와 폭탄, 그리고 햄버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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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전쟁… ‘나쁜 것들’이 현대문명 낳았다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피터 노왁 지음·이은진 옮김/432쪽·1만7000원·문학동네

디지털 화상 및 동영상 파일 형식인 JPEG, GIF, MPEG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72년 ‘플레이보이’에 실린 스무 살의 스웨덴 아가씨 레나 셰블롬의 누드 사진이 그 시작이었다. 1971년 미국 국방부는 화상을 디지털로 만들어 아르파넷 통신망에 전송하게끔 하는 작업을 서던캘리포니아대에 맡겼다. 연구진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스캐너를 만들어 다양한 사진을 스캔했다. 연구진 중 한 사람이 플레이보이 최신호를 사왔는데, 그 속엔 셰블롬의 알몸 사진이 실려 있었다. 젊은 남성들로 구성된 연구진은 이 사진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거듭된 연구 끝에 이 사진은 1975년 아르파넷을 통해 전송됐고 이후 디지털 화상처리의 표준이 됐다.

과거의 문명 발전 속도를 규정한 것이 ‘총, 균, 쇠’였다면, 현대 문명을 이끌어온 것들은 ‘음탕하고(섹스), 사람을 죽이며(폭탄), 건강을 해치는(햄버거) 나쁜 것들’이다. 저자인 노왁에 따르면 그렇다. 전쟁을 통해 개발된 기술이 민간 시장에 나오면서 산업화됐고, 포르노와 패스트푸드 등 인간의 기본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업계를 통해 발전됐다는 것이다.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한 패리스 힐턴의 섹스 비디오 역시 이 공식을 철저히 따른다. 2004년 이 비디오를 본 저자는 화면에 나오는 속살이 분홍색이 아니라 에메랄드빛이었다는 점
섹스와 폭탄, 그리고 햄버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음탕하고 사람을 죽이며 건강을 해치는 이나쁜 것들이 바로 현대 문명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패리스 힐턴(작은 사진)의섹스 비디오 속 야간 투시기법은 군에서 쓰는 기술이었다. 작은 사진 출처 AP

섹스와 폭탄, 그리고 햄버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음탕하고 사람을 죽이며 건강을 해치는 이나쁜 것들이 바로 현대 문명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패리스 힐턴(작은 사진)의섹스 비디오 속 야간 투시기법은 군에서 쓰는 기술이었다. 작은 사진 출처 AP

에 주목했다. 조명 없이 어둠 속에서 야간 투시 기법으로 촬영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이 군에서 사용하는 기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1991년 걸프전 당시 CNN을 통해 이라크가 몰락하는 걸 지켜보는 내 뇌리에 박힌 영상은 힐턴의 섹스 비디오와 마찬가지로 온통 에메랄드빛이었다.”

군에서 개발한 기술을 소비재에 접목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전자레인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한 레이더 기술을 종전 후 가정용으로 만든 것이고, 테팔 프라이팬은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부산물인 테프론을 알루미늄 프라이팬에 결합한 것이다. 정크 푸드의 대명사인 스팸은 병사들에게 높은 열량을 공급하기 위한 전투 식량이었다. 비닐봉지부터 헤어스프레이, 비타민, 집적회로, 구글 어스 등 오늘날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현대기술 대부분은 군사 예산을 쏟아 부어 개발한 것이다.

포르노업계도 현대 문명 발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전자기술을 발전시킨 숨은 주역이 포르노다. 포르노 사이트는 사람들을 인터넷에 몰려들게 했다. 2009년 미국 전체 검색어의 25%가 성인 콘텐츠였고, 전체 웹 사이트의 3분의 1이 포르노 사이트였다. 콘텐츠의 불법 유포를 막기 위해 디지털 워터마크 삽입 기술을 개발한 것도, 고화질을 위해 데이터 압축률이 높은 영상 표준을 채택한 것도, 보안 프로그램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한 것도 포르노업계였다. “당신이 개발한 기술이 쓸 만하고 튼튼한지 알려면 그 기술이 포르노업계에서도 잘 통하는지 보면 된다.”(수전 스트러블 선마이크로시스템스 대변인)

패스트푸드업계 역시 정크 푸드란 오명 아래 온갖 비난에 직면해 있지만, 그동안 현대 문명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예를 들어 전 세계 맥도널드 매장의 주방은 비좁은 공간에서 최대한 효율을 내는 잠수함 속 주방을 본떠 설계해 표준화한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기술은 패스트푸드업계를 넘어 전 식품업계로 퍼져나갔다.

책을 읽다 보면 “섹스와 폭탄, 그리고 햄버거가 현대 문명 발전의 동력이 됐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상의 다양한 사물에서 문명의 뿌리를 찾아내는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다. 특히 21세기를 이끌어갈 로봇 기술과 인공지능 연구의 선봉장에 ‘섹스 로봇’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에선 공감의 웃음이 피식 나온다. 단 자극적인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오감을 자극하는 여성의 몸매 사진이나 입맛을 돋우는 햄버거 사진 한 장 없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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