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가슴 두드리는 동화나라의 환상 선율… 답답한 음향시설마저 감싸 안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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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필하모닉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

“밤이면 잠자러 갈 때 14명의 천사들이 나를 둘러싼다네…그리고 나머지 둘은 나를 천국으로 이끈다오!” 어린이는 없었다. 하지만 어른들로 가득 찬 객석은 ‘어른을 위한 동화’를 들으며 진정 행복해했다. 지휘봉의 궤적에 자석처럼 반응하는 오케스트라의 울림은 ‘무언가(無言歌)’였지만 할머니가 들려주던 동화를 그대로 읽어주고 있었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2012년 첫 콘서트가 열린 14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행복한대극장. 훔퍼딩크의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가운데 남매의 2중창 ‘저녁기도’를 성악 없이 악기로만 노래하는 오케스트라는 오히려 더 호소력 있게 겨울밤을 따스하게 달궜다.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공연 타이틀부터 신년음악회의 틀에 박힌 진부함을 깨는 기획으로 비쳤다. 구자범 지휘자의 취임 이후 후기낭만 음악을 집중 조명하는 시즌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악단의 일취월장하는 실력은 서곡에서부터 감지됐다. 호른을 필두로 한 ‘기도의 동기’에서 관악기의 튼실한 바탕 위에 살포시 얹히는 현악기의 비단결 같은 질감은 국내 정상급 명품 사운드였다. 어디 이뿐이랴. 마녀가 죽는 장면에서 100여 개의 악기에서 전합주로 터져 나오는 소리폭풍은 광기 어린 ‘바그너 후예’에 걸맞은 피날레였다.

쳄린스키의 교향시 ‘인어공주’ 또한 극히 접하기 힘든 레퍼토리다. 저음악기 위에 홀로 물결치는 정하나 악장의 독주 바이올린은 인어공주의 몸짓을 손에 잡힐 듯 보여주었고, ‘왕궁무도회’에서는 바그너의 ‘발퀴레’ 1막 도입부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격렬한 현의 트레몰로를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전곡이 끝나고 지휘자가 완전히 손을 내리기를 기다린 진득한 청중은 그제야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지난해 12월 1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처음 만난 ‘구자범 체제하의 경기필’에서 느낀 ‘혹시나’는 이번에 ‘역시나’로 바뀌었다. 극도로 조탁된 사운드는 예전 4회에서 10회 이상으로 바뀐 피나는 리허설의 결과물이다. 정성 들여 만든 팸플릿은 덤으로 누리는 감동이었다. 더구나 30명에 이르는 객원단원과, 국내 최고라는 서울시향 예산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살림살이로 이뤄낸 쾌거다.

하지만 청중의 박수마저 잠식해 버리는 공연장은 악기 간 배음을 철저히 괴리시켰으며 음악의 감동을 반감시키는 주범이었다. 음악은 ‘행복한대극장’이었으되, 음향은 ‘답답한대극장’이었다. 경기도는 가난한가? 이처럼 열악한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경기도 대표 악단을 지원하고 그야말로 ‘회관’ 수준인 상주극장의 음향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경기필을 찾는 청중의 눈높이는 이미 세계 수준이다. 안도현 시인이 프로그램 노트에 쓴 ‘모순형용’은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poetandlov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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