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인생을 바꾼 그것]강제규 감독의 ‘아버지의 사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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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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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수재가 고교 때 성적 뚝… 사진 찍으며 음지서 빠져나와

강제규 감독은 고교시절 사진을 찍으며 공부 말고 자신이 잘하는 것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사진은 그를 영화의 길로 안내해 줬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시작점은 아버지의 카메라였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강제규 감독은 고교시절 사진을 찍으며 공부 말고 자신이 잘하는 것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사진은 그를 영화의 길로 안내해 줬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시작점은 아버지의 카메라였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망막에 맺히는 세상이 두려워 직시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공부도 싫고, 학교도 싫고, 다 싫었다. 누군가와 얼굴을 맞대는 것조차 불편했다. ‘상담을 받아봐야 하는 것 아닐까.’ 시내에 있던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아갔다. 한참을 혼자 문 앞에서 서성였다. ‘이 나이에 병원 신세까지 질 순 없다’는 생각에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그 상황에서 탈출시켜 줄 끈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성경도 보고 불경도 읽어보았다. 철학서들도 들춰봤다. 교내 문학서클 ‘돝섬’에 들어가 매주 한 편씩 시를 써보기도 했다. 가슴속 응어리를 장난처럼 끼적이는 것이 조금 위안이 됐다. 하지만 깊고 어두운 성장통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비정상이 되어버린 일상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카메라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현실과 다른, 약간 변형되고 틀어진 또 다른 세상이 렌즈에 맺혀 있었다. 강제규(50)는 그제야 공부가 아닌 또 다른 자신의 가능성과 즐거움을 찾았다. 고1 가을이었다. 》
○ 마산의 수재에게 닥친 위기

“마중(마산중학교)에서 맨날 전교 1등 한다는 애가 쟤야.”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들이 힐끔힐끔 훔쳐보며 말하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렸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등하굣길 버스 안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졸업 때까지 전교 1등은 항상 그의 차지였으니까.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도 그는 경남 마산의 수재로 통했다. 강제규는 명문 마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에 갈 것이라는 걸 결코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갔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거예요. 담임선생님하고 사이가 너무너무 안 좋았어요. 맞기도 많이 맞고. 갑자기 천덕꾸러기, 문제아로 찍혀버리니까 당혹스러웠던 거죠. 그런 상황에서 공부가 잘될 리가 있겠어요? 성적도 전교 몇백 등으로 떨어졌죠.”

중학교 다닐 때의 ‘왕자’는 이제 없었다. 때맞춰 사춘기까지 찾아왔다. ‘나는 왜 공부를 하고 있을까?’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 그런 고민들이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욕망 때문이었을까. 현실과 달라 보이는 뷰파인더 속 세상에 무한한 매력을 느꼈다. 렌즈를 통해 사람과 마주하면 불편하지 않았다. 현상되어 인화지에 맺힌 세상에도 매료됐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가방 속에는 항상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시간만 나면 그 무엇이든 카메라를 들이댔다. 돈도 없는 학생이 한 달에 필름 10통씩을 찍어댔다. 친구들에게 눈동자, 시계, 필통부터 시작해 귓불, 발가락까지 보여 달라고 졸랐다. 주말이 되면 교외로 나갔다. 해돋이보다는 해넘이에, 귀여운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보다는 할아버지의 거친 손에 셔터를 눌렀다. 낡고 해진 고무신, 버려진 폐선처럼 폐쇄적이고 어두운 단면들에 그의 답답함이 조금씩 부서져 내리며 자연스럽게 필름에 담겼다.

학교에서 하는 미술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하기도 했다. 반응이 괜찮았다. 그때 미술 선생님한테 칭찬을 들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듣는 선생님의 칭찬이었다. 그렇게 그의 마음도 아주 천천히 음지에서 양지로 걸어 나왔다.

○ 카메라를 좋아했던 아버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마산 부림시장에서 주물 장사를 했다. 학창시절 상가에 불이 두 번이나 나 굉장히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가 카메라를 사달라고 했을 때도, 걸핏하면 현상한다고 용돈을 달라고 했을 때도 늘 별 말씀 없이 막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아버지 덕분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아버지도 카메라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카메라를 갖고 싶어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반 가까이 돈을 모아 카메라를 샀다. 집에 조그마한 암실을 만들어 놓고 직접 현상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카메라를 들고 사진관을 찾으면 사진관 아저씨가 말했다.

“야, 아버지 멋쟁이시네. 이 카메라 좋은 건데 말이다.”

아버지께 사달라고 말씀드린 카메라는 70만 원짜리였다. 당시로선 말을 꺼내기조차 힘든 엄청난 돈이었다. 하지만 더 좋은 카메라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그에게 중고로 나온 니콘 F1과 줌 렌즈 세트는 놓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와 함께, 물건을 사지도 않으면서 매일 찾아가 주인을 귀찮게 했던 카메라점을 찾았다. 이틀 뒤 아버지는 다시 그를 데리고 가 카메라를 사줬다. 아버지는 딱 한마디를 하셨다.

“니가 사진사가 될라고 사진기를 사달라는 건 아이지?”

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로 ‘영남사진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교복을 입고 시상식 장소에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붙잡으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상을 받으러 왔다고 하자 “대리 수상을 하러 왔느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시상식장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뿐이었다.

한번은 사진을 찍다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경남 남지의 한 다리를 찍고 있을 때였다. 다리 밑으로는 낙동강 지류가 흘러가고, 철새들과 갈대, 옛날 나루터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촬영에 빠져 있던 그에게 총을 멘 군인이 다가왔다. 때마침 학생증도 없었다.

“그때 그 병장이 한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간첩에는 나이가 없다면서 일단은 조사를 받아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곳이 군사보호지역이었나 봐요. 형사과에서도 사람이 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간신히 집에 전화를 해 신분이 확인됐다. 필름은 압수당해 그 자리에서 찢어졌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곳에서 촬영을 하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 사진에서 동영상으로

처음 본 8밀리 카메라도 새로 나온 사진기인 줄 알았다. 신기해하는 모습에 가게 주인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이게 영화 찍는 거야.”

“우리가 TV에서 보는 것처럼 영상이 찍히는 거예요?”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르륵. 빈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가 처음으로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일반 사진기와 크기도 별로 차이 나지 않는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영상에 관심이 생겼다.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그 세상과 그 속에서 나를 자극했던 분명한 무엇이 없었다면, 사진에 깊이 빠져들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됐으면 8밀리 카메라든 영화든 더는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겠죠. 한 장의 스틸 사진이든, 또 한 편의 영상이든 다를 것은 없어요. 영상이란 하나하나의 순간이 모여서 연속성을 갖는 것이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관심의 확장이 이루어진 거죠.”

카메라에 빠진 뒤 주말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완행버스를 타고 부산에 갔다. 3시간이 걸렸다. 8밀리 카메라를 본 이후에는 사진만 찍던 일정에 작은 변화가 하나 생겼다. 영화관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닥터 지바고’를 만났다. 먼 훗날 이루게 될, 영화감독의 꿈을 꾸게 만든 영화였다.

그러나 의외로 지금 그에겐 변변찮은 카메라 한 대 없다.

“새 애인에게 홀딱 빠져서 옛날 애인인 사진은 까먹은 거예요. 그리고 지금까지 왔어요. 그런데 요즘은 다시 생각이 나요. 내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그때, 나에게 삶의 에너지와 설렘을 줬던 사진이 다시 나에게 툭툭 말을 걸어오는 거지. 여유가 되고 한가해지면 다시 사진을 찍어볼까 싶어요.”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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