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이성계와 빌헬름 텔 ‘신궁들의 가상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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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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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에선 태조의 각궁, 근접 위력은 텔의 석궁

태조 이성계가 사용하던 각궁과 화살 등 (왼쪽),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에서 소장하고 있는 15세기의 석궁.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위키피디아
태조 이성계가 사용하던 각궁과 화살 등 (왼쪽),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에서 소장하고 있는 15세기의 석궁.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위키피디아
#1
“내(川) 가운데서 한 적장(賊將)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갑옷과 투구는 목과 얼굴을 둘러싼 갑옷이며, 또 별도로 턱의 갑(甲)을 만들어 입을 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므로, 두루 감싼 것이 매우 튼튼하여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는 짐짓 그 말을 쏘니, 말이 기운을 내어 뛰게 되므로, 적장이 힘을 내어 고삐를 당기매, 입이 이에 열리는지라, 태조가 그 입을 쏘아 맞혔다.” (태조실록 1권 총서 41번째 기사 ‘태조와 나하추와의 전투’ 중)

#2
“1307년 11월 18일 스위스 알트도르프 마을 광장. 한 남자가 아들을 바라보고 섰다. ‘아빠를 믿어요.’ 사과 하나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80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아들 발터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활을 쏘지 못하거나 빗맞히면 어차피 둘 다 죽은 목숨이다. 빌헬름 텔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사과를 정통으로 뚫었다.”

‘신궁(神弓)’ 태조 이성계(1335∼1408)와 빌헬름 텔(생몰연도 미상)의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도 얼추 겹친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다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두 사람이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넘어 만나 활을 쏘며 싸움을 벌였다면 누가 이겼을까.

○ 이성계 0 대 빌헬름 텔 1, 그러나…


빌헬름 텔이 사용한 활은 석궁(크로스보·crossbow)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다른 조건은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두 사람만의 전투는 결국 병기, 즉 유럽 석궁과 조선 각궁의 ‘화력’ 및 성능 차이에서 승패가 결정지어진다.

유럽의 석궁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사용된 노포(弩砲·ballista)를 축소 개량한 것으로 ‘크로스보’라는 명칭은 활의 몸체가 십자가 형태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개발 초기에는 사거리가 짧아 활용도가 떨어졌지만 사거리가 개선되면서 11세기 초부터 15세기 말까지 폭넓게 사용됐다. 이때 사용된 석궁은 사거리가 250m에 이르고 갑옷을 관통할 정도로 위력적이고 강력한 살상력을 지녔다. 이로 인해 중세 교회는 990년 남부 프랑스에서 시행한 ‘신의 휴전 협정(Truce of God)’에서 석궁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12세기 로마 교황인 이노센트 2세는 “기독교인 간의 전투에서 석궁 사용을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이성계가 석궁의 사거리인 250m 안에서 전투를 벌인다면 살상력이 강한 석궁을 가진 텔에게 패배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활을 쏘는 속도에서는 이성계가 앞선다. 책 ‘활이 바꾼 세계사’에 따르면 조선 각궁은 분당 평균 15∼16발을 쏠 수 있다. 이에 비해 석궁은 30초에 4발을 쏘는 데 그친다(영국 채널4 다큐멘터리 ‘영국을 만든 무기들·Weapons that made Britain)’. 빌헬름 텔이 석궁을 발로 밟고 화살을 재는 사이에 이성계가 쏜 화살이 어느덧 지척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 이성계의 역전승, 그러나…

또 한 가지, 사거리를 고려하면 이성계가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훈련 책자를 보면 각궁의 최대 사거리는 약 340∼360m라고 명기되어 있다(‘활이 바꾼 세계사’). 각궁이 석궁보다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가 ‘나하추와의 전투’에서처럼 말에 올라 석궁의 사거리를 벗어나 시위를 당긴다면 승리는 이성계 쪽으로 기운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는 남이(박해일)가 누이(문채원)의 뒤에 서 있는 청나라 장군 쥬신타(류승룡)의 몸에 화살을 명중시킨다. 이른바 곡사(曲射)다. 만약 곡사가 더해지면 빌헬름 텔이 장애물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더라도 이성계의 승리가 확실해진다. 그렇지만 곡사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크게 갈린다.

여기서 또 한 가지가 추가된다. 바로 피로도이다. 석궁은 활과 달리 팔 힘에 상관없이 일정한 강도로 발사된다. 아무리 이성계가 화살 여러 대를 곡사로 날려 보낸다 해도 빌헬름 텔이 참고 기다리면 그에게도 기회가 온다. 어느 순간에는 태조가 지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빌헬름 텔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에 달렸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쏘고, 피하고, 쏘고, 피하기만 하는 신궁들의 전투는 자칫 지루한 경연장으로 전락해 구경꾼들의 빈축을 살지도 모르겠다.

단, 각궁은 익히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석궁은 짧은 훈련과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화살을 표적에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다. 신궁이 아닌 초보 궁사들의 싸움이라면 무조건 석궁을 든 초보가 유리하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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