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못다한 이야기… ‘멧돼지 사냥’ 조선말의 전설적 사냥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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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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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좇아 강원도서 만주까지 간 조선 포수의 집념

서울 외곽에서 카메라에 잡힌 구한말 호랑이 사냥꾼들. 한 손에는 곰방대를,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국인 허버트 폰팅이 촬영.
서울 외곽에서 카메라에 잡힌 구한말 호랑이 사냥꾼들. 한 손에는 곰방대를,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국인 허버트 폰팅이 촬영.
《 지난주(15일자) ‘O₂’의 커버스토리는 멧돼지 사냥 얘기였습니다. O₂팀은 사냥에 대해 다각도로 취재하던 중 구한말 명포수에 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냥꾼들을 직접 만났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40년째 써오고 있는 김왕석 작가(84)와의 인터뷰도 진행했습니다. 한반도의 맹수들과 온몸으로 부딪쳤던 옛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추가로 소개합니다. 》

“인천부 내리 칠번디의 이십일호 포수 최학풍(崔鶴豊·53)은 우각리 로경오(盧敬五) 외 다섯 명의 포수와 함께 약 한 달 전에 황해도 방면으로 산양을 갔다가 지난 이십일에 황해도 금천관음굴 산중에서 전긔 최학풍이가 노루 잡는 총을 가지고 노루 산양을 하던 중 돌연히 길이가 넉자가량이 되는 큰 범이 나타나 덤빔으로 할 수 업시 노루 잡는 적은 총으로 사격을 하야 탄환이 다 떠러진 후 범과 가치 약 한 시간 동안 격투를 하던 끗헤 로경오가 달려들어 그 범은 잡앗스나 최학풍은 머리와 손에 중상을 당하고 로경오는 얼골에 중상을 당하야 작 이십칠일 아츰에 인천으로 돌아와 방금 룡리 인제병원에서 치료를 밧는 중 생명에는 아모 관게가 업겟고 약 이주일간 치료를 바드면 전쾌하리라더라.(인천뎐화)”

1926년 2월 28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산중(山中)에서 수렵(狩獵)하다 대호(大虎)와 대격투(大格鬪)’라는 제목의 기사다. 사냥꾼 최학풍이 노루 사냥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호랑이와 한 시간 동안 싸우다 큰 부상을 입었다는 내용. 나중에 동료 노경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탄환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호랑이와 당당히 맞선 기개가 예사롭지 않다. 전설적인 포수들은 그랬다.

○ 조선 말기의 3대 사냥꾼

최학풍은 조선왕조 궁내부에서 정식 허가를 받은 당대의 명포수였다. 그와 함께 ‘포수 두목’ 이윤회(李潤會)와 ‘호랑이 포획의 1인자’ 강용근(姜容根)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한반도를 주름잡던 전설의 사냥꾼들이었다. 왕실에 고용된 이들은 전국을 누비며 맹수들과 자웅을 겨뤘고, 그 결과물로 얻은 범 가죽, 웅담, 녹용 등을 궁에 바쳤다.

당시 대부분의 사냥꾼은 화승총(조총)을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들어온 화승총은 발사에 시간이 걸리고 습한 날이면 사용하기 어려운 점 등 문제가 많았다. 조선 말기 어용포수들은 이를 모두 보완한 최신무기였던 미국제 ‘라이플(소총)’을 사용해 사냥꾼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윤회가 총알 5개로 호랑이 2마리를 한꺼번에 잡았다는 비화가 전해지는 것도 라이플을 가졌기에 가능했다.

‘맹수와 사냥꾼’ ‘수렵야화’ 등 사냥 관련 소설을 신문에 40여 년간 연재한 김왕석 작가는 어린 시절 만난 이윤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윤회는 자신이 사냥을 가르치던 이상오(1905∼1969·동물작가)를 만나러 경북 칠곡군의 집을 가끔 찾았다고 한다. 이상오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 이상화 시인(1901∼1943)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상오 작가 집안과 우리 집안이 친분이 있어 가끔 그 집에 놀러갔었지요. 집에 가 보면 이윤회 포수가 꿩도 잡아오고, 어떨 때는 표범도 잡아다 놓고 그랬어요. 크고 당당한 체격에 근육질 몸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 최고의 명포수 홍학봉

김 작가가 첫손에 꼽는 사냥꾼은 따로 있다. 이윤회 등보다 한 세대쯤 아래인 홍학봉(1901∼1976)이다. 빼빼 마른 체격에 키도 그다지 크지 않았던 홍학봉은 남들에겐 없는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수백 m 앞 풀숲의 작은 움직임까지 포착해내는 밝은 눈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천리안의 학봉이’, ‘무쇠다리 학봉이’라 불렀다.

홍학봉은 경기 의정부 출신으로 그곳에서 방앗간을 했었지만, 사냥은 주로 강원도에서 했다. 한 번 쫓기 시작한 호랑이를 끝까지 추적하느라 백두산을 넘어 만주까지 올라갔었다는 얘기는 홍학봉의 집념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비화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의 ‘2004년도 우리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사업’ 프로젝트 중 하나인 ‘사냥-전통수렵방법과 도구’(sanyang.culturecontent.com)에도 홍학봉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소개된다. 이는 콘텐츠 전문제작업체 다할미디어가 사냥과 관련한 각종 사료 및 논문을 바탕으로 김광언 인하대 명예교수, 김왕석 작가 등에게 자문해 만든 것이다.

“이 선생(이상오 작가)과 홍 포수(홍학봉)는 1916년 6월 늑대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고령군 내 산간마을을 돌아다녔다. 이 선생이 홍 포수와 함께 사냥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그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듣고 있었다. 소문대로 역시 예사 포수가 아니었다. 구차스럽게 일일이 발자국을 보면서 추격을 하지 않았다. 그는 늑대가 도망가는 방향을 파악하고 뒤따라가고 있었다. 보통 포수의 추격보다 훨씬 빨랐다. 무쇠다리 학봉이란 별명대로였다.”

물론 1916년은 이상오 작가가 만 11세, 홍학봉이 만 15세이던 때니 연도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의 사냥꾼들은 국가 위기 때 전쟁에 나가 활약하기도 했다. 19세기 미국의 동양학자인 윌리엄 그리피스는 조선의 포수들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양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국, 은둔의 국가’(1907년)에 기술했다. 병인양요 때는 포수 370명이 프랑스군과, 신미양요 때는 포수를 중심으로 한 별초군 3060명이 미군과 맞섰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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