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어린아이 팔뚝 굵기 붕장어를 통째로…허화백 고향의 ‘보양식 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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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30일 07시 00분


여수가 고향인 허영만 화백에게 장어탕은 익숙하면서도 애틋한 음식이다. 빗속을 자전거로 달려온 고향땅에서 장어탕을 마주한 허화백이 감회에 젖어 막걸리를 권하고 있다.
여수가 고향인 허영만 화백에게 장어탕은 익숙하면서도 애틋한 음식이다. 빗속을 자전거로 달려온 고향땅에서 장어탕을 마주한 허화백이 감회에 젖어 막걸리를 권하고 있다.
12. 보성~사천 <상>

■ 여수 ‘뚝배기 우거지 통장어탕’

추적추적 가랑비에 설마설마

순천만 보일 때쯤 아예 쏟아지는데
자전거 바퀴 타고 튄 흙탕물
등판에 다람쥐 무늬 만들고

헉! 설상가상 연달아 펑크까지


집단가출팀의 날씨 운은 꽤 좋은 편이다.

재작년 요트로 영해외곽선을 항해할 때도 가끔 강풍과 큰 물결을 만나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12번의 항해에서 3200여km를 달리면서도 비 때문에 고생한 경우는 드물었다. 2월에 동해를 북상하며 영덕 북동쪽 10마일 해상에서 단 한차례 폭풍우를 만난 걸 제외하면 우리의 옷은 파도에 젖을지언정 빗물에 젖는 일은 많지 않았다.

현재 진행 중인 자전거 전국일주여행도 마찬가지. 지난해 9월 강화도를 출발한 이후 5월에 변산∼선운산 구간을 달리며 급작스런 폭우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던 것을 빼면 항상 찬란한 태양이 함께 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는 투어 때마다 이글거리는 땡볕이 계속되어 오히려 비가 시원하게 내려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이번 여름은 우기가 몹시도 길어 햇볕을 보기가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유독 우리들만 보살폈는지 우리들의 자전거가 지나는 곳마다 때맞춰 먹구름을 거둬줬던 것이다.

그러나 장마다 꼴뚜기일 수는 없는 법인가보다. 집단가출 자전거 해안선일주 제12차 투어 보성∼순천∼여수∼광양∼사천 구간에서 우리의 날씨 운은 끝났다. 추적추적 내리던 가랑비는 멀리 순천만이 보일 때쯤부터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사실 비 오는 날 자전거 라이딩은 몹시 위험해 어지간하면 감행할 일이 못된다. 노면이 젖어 미끄럽고, 자동차 운전자들의 시야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가출 멤버들에겐 반드시 가야만할 길이 있다. 그러니 날씨와 관계없이 곰비임비 악천후를 뚫고 갈 길을 가는 수밖에 하는 없다.

돌산대교를 건너 향일암으로 이어지는 17번 국도의 우중 라이딩.
돌산대교를 건너 향일암으로 이어지는 17번 국도의 우중 라이딩.

● ‘집단가출’팀 날씨 운도 끝나, 장대비 맞으며 도착한 순천만

비가 올 땐 자동차 도로를 피해서 오프로드로 들어서는 것이 안전을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에 드넓게 펼쳐진 순천만을 향하며 여수로 직통하는 863번 지방도로를 버린 것도 빗길에 자동차와 나란히 달리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해룡면에서 벌교 별량면 쪽으로 논길을 얼마간 달리자 순천만으로 흘러드는 하천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 건설현장이 나타났다. 이 물길은 멀리 지리산 골짜기에서 발원해 구례에서 섬진강과 헤어진 뒤 순천만에서 바다와 만나는 지류인데 고가대교가 한창 공사중이어서 곳곳에 물웅덩이가 도사리고 있다. 비는 좍좍 퍼붓고 흙탕물 웅덩이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 피할 길은 없어 잠깐 사이에 일행들은 흙투성이의 흉악한 몰골이 됐다.

빗길에서 자전거를 타면 다람쥐가 된다고들 한다. 자전거 뒷바퀴에서 튀어 오른 흙물이 엉덩이와 등에 뿌려지며 남기는 무늬가 흡사 다람쥐꼬리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다람쥐가 되어 도착한 비 내리는 순천만은 차분하고 고즈넉했다. 빗줄기 사이로 잔잔한 바람을 타고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흩어지는 모습이 만의 어귀에 지천으로 피어난 갈대숲을 배경으로 펼쳐져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다.

순천만 생태공원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자연학습로가 있어 그 길을 이용해 순천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용산 전망대까지 건너간 뒤 내쳐 여수로 진입할 계획이었으나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순천만 안내원으로부터 자연학습로는 걸어서 갈 수는 있지만 보행자 보호를 위해 자전거는 통과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얘기를 들은 것이다. 친환경 무공해 교통수단인 자전거 통행을 막는 것은 맘에 들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규칙은 규칙.

여수 구간에서는 유난히 자전거 고장이 잦았다. 유압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가 하면 2명의 자전거에 연달아 펑크가 났다.
여수 구간에서는 유난히 자전거 고장이 잦았다. 유압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가 하면 2명의 자전거에 연달아 펑크가 났다.

빈속에 빗길 레이스 에너지는 바닥
허 대장 지인의 강추 상아식당서 스톱
뚝배기 한가득 붕장어 싹싹 비운 후
캬! 막걸리 한사발에 멍게젓갈 안주
악천후 뚫고 달린 보람 있었네


할 수 없이 왔던 길을 되짚어 여수반도의 서쪽해안을 타고 가는 863번 지방도로 재진입한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선학리, 농주리, 상내리, 상봉리를 거쳐 달리는 집단가출 나그네들의 등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른다.

모기 주둥이가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코 앞. 절기상 처서를 지나면 사실상 가을이라는데 계속되는 페달링으로 달궈진 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닌 게 아니라 가을비처럼 차갑다.

율촌면을 지나 소라면 고갯길에서 정상욱 대원의 앞바퀴에 펑크가 났다. 스페어 튜브로 갈아 끼우고 다시 출발하려는 찰나, 이번엔 언덕을 힘차게 치고 오르던 김승정 대원이 슬그머니 자전거에서 내린다. 역시 펑크.

날도 궂고 갈 길도 멀어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순천만에서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온 데다 2차례의 연이은 펑크 사고로 시간이 지체되자 체온이 떨어지며 아침식사로 먹은 누룽지탕의 칼로리는 바닥을 드러내 허기가 밀려온다. 게다가 설상가상 비는 내리고….

식사를 마친 뒤 더 굵어진 빗줄기에 출발을 머뭇거리며 낙수가 떨어지는 식당처마 밑에 앉아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자전거식객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 달리비는 멈추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더 굵어진 빗줄기에 출발을 머뭇거리며 낙수가 떨어지는 식당처마 밑에 앉아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자전거식객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 달리비는 멈추지 않았다.

● 허영만 대장 홈그라운드 여수…우거지 통장어탕과 멍게 젓갈

두 개의 언덕을 더 넘고 여수 시내를 관통하고 돌산대교 앞 국동 상아식당에 도착했을 때 몸 안에 있던 에너지가 모두 쥐어짜져 더 이상 달리래야 달릴 수도 없는 상태였다.

여수는 허영만 대장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홈그라운드다. 허대장의 고향 지인들의 추천으로 찾은 상아식당의 간판 메뉴는 우거지 통장어탕.

남해안의 주력 보신 메뉴 중 하나인 장어탕은 보통 장어 배를 갈라 펼친 상태에서 끓이는데 이 집은 장어를 통으로 쓰고 무청이나 배추겉잎을 삶아 말린 우거지를 듬뿍 넣는 것이 특징이다. 장어는 활어 상태에서 바로 요리되어 커다란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데 먼 바다에서 주낙으로 잡은 어린아이 팔뚝 굵기의 큰놈들만 쓰는 덕분에 국물 맛이 깊다.

“바다장어는 크게 두 종류, 하모와 붕장어가 있어요. 우리 집은 붕장어를 쓰는데 연안에서 통발로 잡히는 장어는 작아요. 큰 놈은 주낙으로 잡는데 통발 장어보다는 주낙 장어가 맛이 더 좋죠. 잡히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으니까….”

식당주인 손영숙 씨(56)는 남해 다랭이논 부근이 고향으로 그녀의 통장어탕이 성공을 거둔 이후 국동, 월호동 인근에 장어탕집들이 앞 다퉈 생겨났다. 경상도에서 온 숙수가 호남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셈.

하기야 전남 여수에서 경남 남해는 빤히 바라다 뵈는 가까운 거리로 영호남이 섞여있는 곳이니 식재료나 요리솜씨도 영호남 구분이 불분명하다. 여수와 이웃한 전남 광양에서 하구의 강폭이 500여m에 불과한 섬진강만 건너면 바로 경남 하동 땅인 것이다.

찬비에 젖고 배고픈 나그네들은 장어탕 뚝배기를 뚝딱 비워낸 뒤에야 상 위에 올려진 그 밖의 반찬들에 눈길을 돌렸다.

반찬 중 압권은 멍게 젓갈. 멍게살을 소금에 삭힌 멍게 젓갈은 젓갈 특유의 짠맛과 함께 멍게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뜨거운 쌀밥에 한 점을 올려 입안에 넣으면 그윽한 풍미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특히 이 지역 막걸리에 너무도 잘 어울려 멍게 젓갈 세 접시를 비우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식당을 나서자 빗줄기는 더 굵어져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처량하다. 하지만 더 처량한 것은 이제 겨우 옷이 말라가는데 다시 저 거센 빗속으로 길을 떠나야하는 우리들….

글·사진|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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