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당신들 모두 서른살이 됐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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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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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의 삶 이건 아니다 싶어…

《 “난 불안한 건 참을 수 있어도 진부한 건 못 참아. 꿈과 돈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이라는 건 너무 진부해.”

-김연수,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단편집 ‘세계의 꿈 여자친구’ 중) 》

반항기 가득한 20대의 이완 맥그리거가 에든버러 로열마일 거리를 질주하며 내뱉던 ‘트레인스포팅’의 독백을 기억한다. ‘Choose life(인생을 선택하라)’로 시작하는 그 대사의 요지는,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텔레비전을 선택하고, 건강검진 종류를 선택하고, 차와 더 넓은 집을 선택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경멸이었다. 태어나면 입학하고, 졸업하면 취업하고, 취업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갖고, 아이가 자라면 집과 차를 사고, 그런 뒤 맹렬히 늙어가는 생애주기에 대한 전면적 사보타주 선언. 매일 출근할 직장이 있다는 데 안도하고 퇴근 후 소파에 파묻혀 맥주 한 잔에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소일하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거부. 예상보다 더 나온 공과금, 눈엣가시 같은 동료와의 신경전 외엔 이렇다 할 골칫거리조차 없는 그저 그런 인생에 대한 혐오. 나는 감히 말해본다. 누구나 한때는 그런 반항아, 그 시절의 ‘이완 맥그리거’였다.

물론 지금은 사뭇 다르다. 여타의 평범한 인간들과 차별화되는 인생, 돈 몇 푼에 구차하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꿈꿨던 우리는 건설·통신·은행 기타 등등의 조직 말단부에 입성해 누구 못지않게 평범하게 살고 있다. 자신이 관료제에 이토록 성공적으로 적응 가능한 인간이란 사실에 가끔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면서 말이다. 어른들이 그들만 아는 암호처럼 쑥덕이던 ‘사회생활’이란 것의 애환을 몸소 체험하며 우리 역시 어른이 됐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온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식과 접대, 낮잠 한 번에 다 지나간 주말, 메뚜기 떼처럼 쏟아지는 환승역 인파 속에서의 출근 전쟁. 숙취와 매너리즘에 찌든 채 다시 사무실 책상에 앉노라면 ‘싸구려 커피’ 장기하의 의뭉스러운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 판다.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뭔가는 아닌 현실에 대한 자각. 그때부터 삶을 유의미하게 할 여러 자구책이 동원된다. 팍팍한 사회생활로 무뎌진 감수성을 되살리고, 대책 없이 저지르고 대안 없이 반대하던 시절의 패기를 되찾기 위해서다. 기타 줄을 튕겨 보고, 화집을 사 모으거나 와인을 배운다. 복싱이나 스쿼시를 배우고 마사회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승마 수업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전날 설거지거리를 그대로 쌓아둔 채 요리학원에서 쿠키와 케이크를 굽고, 과감히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이런 다채로운 노력의 공통점은 딱 하나뿐이다. 돈이 든다. 사실상 자기계발의 미명하에 이뤄지는 이 모든 몸부림은 충동적 소비의 다른 양태일 뿐, 우리를 괴롭히는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저 그것들이 주는 피상적인 느낌을 사랑하고 위로받을 뿐이다. 속박 당하지 않는 ‘듯한’ 느낌, 자유로운 영혼이 된 ‘듯한’ 기분을.

우리는 어쩌면, 꿈꾸던 것과 다르게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출퇴근하고, 월급을 받고, 주택담보대출과 학자금을 막으며 흘러가는 삶 ‘그 이상’을 원한다. 실핏줄을 타고 미미하게 흐르는 한때의 반항과 열정은 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선 좀 더 본질적인 뭔가가 필요하다고 속삭인다. 하지만 그 뭔가란 과연 뭔가. 제대로 치지도 못하는 기타, 손수 구워낸 맛없는 쿠키, 어울리지 않는 스모키 화장, 거기서 얻는 피상적 위안들인가. 분명 이도 저도 아니다. 하지만 일률적 삶의 방정식을 거부할 패기도, 자유롭단 ‘느낌’ 대신 ‘진짜 자유’를 갈구할 용기도 우리에겐 없다. 이완 맥그리거처럼 ‘Choose life’란 명제를 거부하려면 온몸으로 밀려드는 불안에 맞서 싸울 정도의 헝그리 정신은 있어야 한다. 반대로 ‘Choose life’ 하겠다면, 일상의 불가피한 진부함 정도는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을 때만 미칠 수 있는’(오은 시인) 이 세대의 비겁함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불안한 것도 진부한 것도, 모두 견디지 못한다.

appena@naver.com

톨이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Humor, Fantasy, Humanism을 모토로 사는 낭만주의자.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부류. 불안정한 모험과 지루한 안정감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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