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밀랍 벗기고 종이는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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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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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본 131권 훼손 심각… 문화재硏 복원기술 고심

밀랍이 녹은 뒤 굳어 한지가 뭉치
고 찢어진 세종대왕실록 제105권.
밀랍이 녹은 뒤 굳어 한지가 뭉치 고 찢어진 세종대왕실록 제105권.
《“조선왕조실록 말인데요, 좀 와서 봐주셔야겠어요.” 1998년 가을, 서울대 규장각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그것이 시작이었다. 퇴근 후 서울대 규장각 서고를 찾은 이규식 문화재청 연구사(현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장)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줄줄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후 13년째 여기 매달려 있죠.”

이 실장은 태조∼명종대 실록 ‘밀랍본’ 복원사업 총괄담당자다. “왜 오래 걸리느냐”는 질문에 이 실장은 겸연쩍게 웃으며 “하나(밀랍)는 없애고, 하나(종이)는 살리는 모순을 동시에 수행할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지에 벌집의 성분 ‘황랍’을 입혀 만든 밀랍본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본이다. 1998년 문화재연구소는 인천 강화군 정족산사고에서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진 실록 1299권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여 131권의 밀랍본이 심각한 손상 상태임을 밝혀냈다. 본래 보존을 위해 발랐던 천연밀랍 성분이 녹아 한지가 찢어지고 색이 바랬다. 딱딱하게 굳은 부분은 곰팡이마저 슬어 건드리면 당장에 바스러질 지경이었다.

조사를 거쳐 2006년 본격 복원기술 개발을 시작했다. 복원사업의 핵심은 한지에서 밀랍을 제거하고 흩어진 종이들을 접합해 원상태로 돌리는 것. 문화재연구소는 강원대 제지공학과 조병묵 교수팀과 함께 2008년 실록 원지와 밀랍, 먹, 아교 등 재료 분석을 마치고 곧바로 밀랍을 제거하는 탈랍(脫蠟)실험에 들어갔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연구원이 미세영상측정기로 실록 밀
랍본을 복원한 재현품의 종이 상태를
살피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연구원이 미세영상측정기로 실록 밀 랍본을 복원한 재현품의 종이 상태를 살피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연구진이 개발한 탈랍법은 세 가지. 클로로포름에 종이를 넣고 밀랍을 녹이는 ‘용매 탈랍법’, 열과 압력을 가해 밀랍을 빼내는 ‘가온·가압 탈랍법’, 액체 상태의 이산화탄소에 밀랍을 녹여내는 ‘초임계 유체 탈랍법’이다.

문제는 종이였다. 밀랍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실험 과정에서 종이도 상하기 일쑤였다. “용매인 클로로포름에 종이를 넣으면 밀랍이 녹지만 종이도 바스러집니다. 열과 압력을 가할 때도 마찬가지죠.” 조 교수가 설명했다.

밀랍본 제작과정이 불분명한 점도 복원을 어렵게 하고 있다. “실록 관리기록인 ‘형기안’이라는 고서에는 ‘어느 지방에서 한지 몇 묶음이 왔다’ ‘어디 콩을 썼다’ 정도의 기초적인 정보만 적혀 있어요. 밀랍이 어떤 종이에 어떤 방식으로 뿌려졌는지 알아야 안전한 방식으로 떼어낼 수 있는데 말이죠.” 연구진은 첨단기기를 동원해 밀랍본 조각에서 나오는 미세가스를 분석하고, 실록 재현품에 수백 년 분량의 열과 압력을 가한 뒤 원본과 비교해 보는 방법으로 원래 제작기법을 하나하나 역추적하고 있다. 그나마 실험에 쓸 수 있는 원본은 새끼손톱 절반만 한 조각. 이마저도 규장각 측이 몇 년에 한 번씩만 제공할 뿐이다. “열악하죠?” 이 실장이 멋쩍게 웃었다.

다른 나라 고문서 중에도 초(醋) 등 인공 파라핀을 바른 밀랍본이 있지만, 한지에 천연 파라핀을 입힌 밀랍본은 세계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게 연구진 설명이다. 차용하거나 참고할 만한 탈랍기술이 없다는 뜻. 그야말로 ‘전 세계 유례없는 단 하나의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남은 과제는 많다. 연구진은 일단 탈랍기술을 원본에 적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다듬고, 원지의 강도를 보강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할 예정이다. 실록의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큰 숙제다. 이 실장은 “정기점검을 통해 규장각 서고 항온·항습기능을 강화하고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불활성가스를 개발하는 일을 별도로 계획 중이다. 2014년까지 작업을 완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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