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거는 사라져도 옛날은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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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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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대하여
파스칼 키냐르 지음·송의경 옮김 384쪽·1만3000원·문학과지성사

‘꿈은 육체가 다시 옛날에 잠기게 한다. 즉 불가분한 원초적 상태, ‘자궁=안’ 삶의 즉각적 만족 상태에 빠지게 한다. 잠은 에고(Ego)가 용해되어 다시 숨으러 오는 늙은 육체의 주인이다. 잠자는 사람은 옛날로 빠져드는 게 아니라 녹아든다. 옛날 속으로 사라진다. 옛날 깊숙이 용해된다.’

그의 문장에는 많은 괄호들이 들어 있다. 눈에 보이는 괄호들은 아니다. 그러나 구절 간, 문장 간 비워진 부분이 많다. 성기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글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깊은 생각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옛날에 대하여’에서는 짧은 에세이가 이어진다. 그 글들은 모두 ‘옛날’에 대한 정의다. 가령 어부가 사해에서 건진 누런 구리단지에서 솔로몬 왕을 자처하는 정령이 나타난다. “솔로몬 왕이 죽은 지는 1600년 되었고 지금은 종말이다”라고 주장하는 어부에게 정령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오직 하루의 시작이 있을 뿐”이라며 “이 세상에 황혼이란 절대 없다”고 말한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의 시간개념을 무화시키는 이 이야기에서 ‘옛날’이란 오직 ‘세상이 시작된 하루’만을 가리킬 뿐이다.

‘옛날’과 ‘과거’를 비교하는 작가의 성찰에선 이 개념이 구체화한다.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과거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옛날에 비해 과거를 결정짓는 요인이다. 과거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은 바꾸지 못한다. 시대에 이어 국가, 공동체, 가족, 생김새, 우연, 즉 조건이 되는 무엇이 끊임없이 과거를 좌지우지한다. 질료, 하늘, 땅, 생명은 영원토록 옛날을 구성한다.’

옛날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지만, 작가는 언어를 통해 옛날을 복원하려 애쓴다. 그는 그 작업이 완전하게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글 쓰는 사람의 임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옛날’은 뿌리 없이 떠도는 현실에 처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붙잡아 주는 삶의 기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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