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고결한 기품, 꿋꿋한 기상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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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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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 이선옥 지음 336쪽·2만3000원·돌베개

깊은 겨울밤, 커다란 백자 사발에 물을 붓고 잠시 밖에 내놓으면 얼음이 언다. 얼음을 뚫고 안쪽의 물을 쏟아낸 뒤 그 안에 초를 밝힌다. 마치 달빛처럼 은은한 빛이 비친다. 선비들은 둘러앉아 그 빛에 매화를 비춰 감상하며 좋은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조선 후기 ‘빙등조빈연(氷燈照賓宴)’의 풍경이다.

일부러 얼음을 얼려 그 안에 촛불을 넣거나 눈 속에 핀 매화를 보기 위해 직접 높은 산을 오르는 수고를 할 만큼 당대 문인들의 매화 사랑은 지극했다. 매화뿐만이 아니었다. 매화를 포함해 난, 국화, 대나무까지 사군자(四君子)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담는 대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미술사 전공자로 주로 문인화에 대한 책을 저술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와 시대별 특징, 사군자에 얽힌 문인과 화가들의 일화 등 사군자의 모든 것을 담았다.

매, 난, 국, 죽이 사군자로 묶여 불리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16세기 말,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다. 이 무렵 발간된 ‘매죽난국사보’에 처음으로 네 식물을 한데 묶어 ‘사군자’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초기부터 네 식물을 한 묶음으로 시를 짓거나 함께 그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사군자’라는 단어가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초기인 1920년경이다.

봄 매화, 여름 난, 가을 국화, 겨울 대나무라는 계절감각 역시 저자는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계절 감각에 맞춰 설정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봄 난, 여름 대나무, 가을 국화, 겨울 매화로 연결지었다. 일본에서는 특유의 계절감각은 나타나지 않았고 보통 중국을 따르는 편이었다.

각각의 식물은 그 고유의 속성을 사랑한 옛 문인들의 고사 덕분에 더욱 그 명성을 높였다. 당나라 시인 맹호연은 눈 속 매화를 찾아다녔고, 북송 때의 시인 임포는 매화를 아내 삼아 산 속에 은거했다. 퇴계 이황은 죽기 직전 마지막 말로 ‘분매(盆梅)에 물을 주어라’고 했을 정도였다. 눈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워내는 모습, 성글고 구불구불한 가지에서 느껴지는 고상한 운치 때문이었다.

17세기에 그려진 어몽룡의 ‘월매도’. 특유의 화풍이 살아있는 그림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5만원권 지폐에 일부가 실리기도 했다. 강세황의 ‘목란’(위), 정조의 ‘야국’(중간), 민영익의 ‘묵죽’(아래) 사진 제공 돌베개
17세기에 그려진 어몽룡의 ‘월매도’. 특유의 화풍이 살아있는 그림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5만원권 지폐에 일부가 실리기도 했다. 강세황의 ‘목란’(위), 정조의 ‘야국’(중간), 민영익의 ‘묵죽’(아래) 사진 제공 돌베개


난을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보고 애호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경 공자가 살던 시대부터다. ‘시경’에 실린 공자의 시 ‘유란조(幽蘭操)’에는 뛰어난 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잡초에 섞여 자라는 난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때의 난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난과는 달랐다. ‘시경’에 실린 난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이때의 난은 국화과의 택란(澤蘭)이었다. 물가에서 자라고 잎과 줄기에서는 향이 나서 방향제나 살충제로 사용했다. 현재 사군자화에 등장하는 모양의 난은 송나라 무렵부터 주목받았다. 우리나라에는 애란가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데, 저자는 이를 난이 중부 이남에서만 자생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현존하는 난 그림은 대부분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그림과 그를 이은 조희룡, 흥선대원군의 그림이다.

국화는 ‘귀거래사’로 유명한 육조시대 시인 도연명과 관계가 깊다. 그는 관직을 버리고 돌아온 고향의 친근함에 국화를 빗대는 등 국화와 은일(隱逸)을 결부시켰다. 여러 빛깔 중에서도 오방의 중심인 황색 국화가 특히 사랑받았다. 장수나 복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여겨져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꽃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양죽기(養竹記)’에서 대나무의 속성을 여물고, 바르고, 속이 비어 있고, 곧은 것으로 정의하고 이를 곧 군자의 덕으로 묘사했다. 진나라 서예가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는 ‘이 사람(此君)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겠는가’라며 극진한 대나무 사랑을 보였다. 머무는 곳에 대나무가 없으면 잠을 이룰 수 없어 반드시 대나무를 옮겨 심었을 정도여서 이를 묘사한 후대의 그림도 남아있다. 이후 ‘차군’은 대나무를 가리키는 고유한 단어로 정착되기도 했다.

저자는 250장이 넘는 그림과 함께 시대별 사군자화의 변천사를 짚어내기도 한다.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바로 매화 그림이다. 조선 중기까지는 하늘로 곧게 뻗은 가지, ‘*’ 모양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꽃술, 작은 꽃 등이 주요 요소였다. 조선 후기에는 과장됐다 싶을 정도로 굽은 가지, 나무에 비해 큰 꽃 등이 등장한다. 흰 꽃을 선호한 것은 여전했지만 조금씩 색깔을 입힌 꽃이 등장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사군자화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사군자부’가 독립돼 있었을 정도로 독자적 위치를 인정받으며 많은 화가를 배출했다. 특히 당시 조각가 김복진이 ‘사군자는 조선 사람의 독단장(獨壇場)’이라고 말할 정도로 조선인 화가의 실력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11회 전람회에서 사군자부가 동양화부에 편입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저자는 “사군자화는 그 위상에서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단순한 구성과 서예의 기법을 활용한 문인 취향의 특성으로 인해 꾸준히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며 “소재의 상징성이나 사군자화의 역사성뿐 아니라 수묵의 흑백이 주는 현대적 조형성 등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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