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는 元-明교체기 혼란의 산물”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12일 03시 00분


코멘트

이영 교수, 日학계 ‘고려 쇠퇴로 자주 출몰’ 주장 반박

고려 말기인 14세기 중엽 한반도의 해안에 왜구가 자주 출몰했다. 왜구 발호의 원인으로는 그동안 고려의 토지 제도 문란과 그로 인한 군사제도의 혼란이 지목돼 왔다. 그러나 당시 왜구 창궐의 근본 원인을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동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영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10일 한일관계사학회가 서울 서대문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한 ‘한일 역사 속의 전후처리’ 학술대회에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왜구’를 발표하고 이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이 교수는 “고려 말 왜구의 발호는 중국의 원 명 교체로 인한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동의 산물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고려 조선왕조 교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고려의 토지제도 문란과 그에 따라 발생한 군제의 동요 때문이라는 일본 학계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이 교수는 “왜구는 토지제도가 문란하지 않았던 조선 초는 물론 조선보다 국력이 크고 강한 명나라도 침략했다”며 “기존 학설은 지나치게 미시적이며 왜구 발호의 본질적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고려 말 명나라의 등장으로 원나라의 동아시아 지배 체제(팍스 몽골리카)가 붕괴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왜구 활동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침공으로 압박을 받은 일본에서는 정치가 전제화되고 이로 인해 사회 모순이 심화됐다”면서 “이렇게 축적된 모순은 몽골(원)이 사라지자 더 억제되지 못하고 남북조 동란과 왜구의 확산으로 표출됐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새 주인공으로 등장한 명이 왜구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고려와 일본의 외교적 결속이 촉진되기도 했다. 이 교수는 “명이 고려와 일본에 왜구 억제를 강요하자 같은 고민을 안게 된 양국은 외교적으로 가까워졌다”며 “최영의 요동정벌이나 박위의 대마도 원정도 양국 간의 신뢰관계 때문에 추진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시기 고려와 일본의 외교적 신뢰관계는 이성계가 ‘왜구 위협’을 명분으로 반대했음에도 고려 왕조가 요동정벌을 감행하는 원인이 됐고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