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테마 에세이]목도리<3>박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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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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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실로 뜬 ‘사랑’


눈이 내릴 듯 하늘이 무거운 12월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 다이앤 잭슨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노맨’(1982년). 많은 이에게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슬픈 동화로 기억되는 영화다. 그것은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던 눈사람이 시간과 함께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어린 시절도 그럴 수밖에 없음을 어쩌면 너무나 참담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눈사람이 녹아버린 자리에 덩그마니 남아 있던 목도리의 남루함과 그로 인한 오랜 아픔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 엄정한 현실을 아는 순간 소년의 어린 시절은 끝남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머니에는 눈사람과 북극에 놀러갔을 때 산타클로스에게서 받은 푸른 목도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을 보낸 1980년대 여학교에서는, 학과 진도와 기말시험이 끝나고 나면 학생들이 뜨개질거리를 가져와 틈틈이 목도리를 뜨곤 했다. 조개탄 난로의 열기와 그 위에서 김을 내는 알루미늄 도시락, 그리고 뺨이 발개진 소녀들이 뜨개질에 열중하던 모습은 한가롭고 정겨운 겨울 풍경이었다. 나도 꽤 여러 개의 목도리를 짜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난다. 고운 빛깔의 털실뭉치를 사고, 그것을 다시 동그랗게 감아, 긴 목도리를 뜨는 정성은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믿음과 그로 인한 기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들이 뜬 목도리들은 누군가의 목을 감싸 추위로부터 그의 온기를 지켰을 것이다.

요즘은 체온 조절을 위한 털실 목도리는 거의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싸고 품질 좋은 공산품의 생산과 바쁜 도시 생활로 목도리를 직접 뜨개질하여 선물하는 일 또한 드문 일이 되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푸른 목도리는 문득 ‘추억’으로, 때로는 ‘꿈’이나 ‘낭만’으로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지만 그것이 눈사람에게조차 목도리를 매주었던 손길로 쉽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 해가 다 가는 12월, 마음이 음산하고 살 속이 시린 것은 우리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채 자기의 푸른 목도리만 만지작거리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 목도리를 뜨던 소녀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고려대 HK연구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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