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과 함께 떠나는 한반도 바닷길 요트 일주] 음악에 젖은 섬…바다는 밤새 몸을 뒤척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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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5일 11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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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군산항에서 서쪽으로 66km 떨어진 전북 최서단 어청도. 방파제에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 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군인 두 명이 다가와 경례를 붙인다. 야심한 시각, 느닷없는 방문에 놀라 당황한 우리 앞에서 군인들은 다짜고짜 군복 윗도리를 벗더니 앉아쏴 자세로 돌아 앉아 등을 내밀었다.

“허 화백님 팬입니다. 셔츠에 사인을 해주시면 길이길이 간직하겠습니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던 허 선장은 너털웃음과 함께 아들 같은 군인의 등에 그림과 함께 정성스레 사인을 했다.

야영지로 고른 곳이 하필 해군 경비함 정박장 바로 옆. 덕분에 해군들의 방문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불침번 근무 중인 동료, 휴가를 받아 외출 중인 선임병의 것을 부탁하는가 하면 중대 깃발을 들고 온 병사도 있었다.

유쾌한 가운데 장난기가 발동한 허 선장이 넌지시 한마디 한다. “아이구, 팔 아파. 이거 1개 사단이 다 몰려올 것 같은데 맨입으로 되겠나?”

잠시 후 부사관 한 명이 일등병과 함께 뭔가 묵직하게 들어있는 망태를 들고 찾아왔다. 망태 속엔 살이 통통히 오른 놀래미, 우럭, 볼락이 펄떡거렸다. 도마와 칼까지 준비해온 부사관은 번개처럼(정말 번개였다!) 회를 떠 우리 앞에 놓아두곤 “우리 병사들에게 사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경비정으로 돌아갔다.

어청도 해군들이 허 화백의 방문을 안 것은 저녁 때 섬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집단가출 트리오’의 공연 때문이었다.

집단가출호에는 권평원(키보드), 김미숙(해금), 조은주(오카리나) 등 프로페셔널 연주자인 선원 3명이 있다. 프로젝트 퓨전 앙상블 집단가출 트리오는 섬에서 연주회를 한번 하자고 별러왔는데 바로 어청도가 항해 개시 후 첫 공연의 현장이 된 것이다.

연주회는 ‘대박’이었다. 마을회관 앞 공터에 자리를 벌이자 청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섬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00여명의 주민들이 ‘운집’했다. 클라이맥스는 허 화백 원작의 애니메이션 주제가인 ‘날아라 슈퍼보드’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청도 초등학교 꼬마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성연이, 나영이 은이 등 2학년 여자애들이 시작한 춤은 이어 다빈이, 다준이 형제와 유진이 등 남자 아이들도 불러들였다.

연주가 원더걸스의 ‘노바디’로 이어지면서 아이들의 신바람은 좌중으로 급속히 전파됐다. 쭈뼛쭈뼛 박수만 치던 김완기 이장(42) 등 어청도 주민들도 춤판에 합류했다. 전북에서 가장 먼 바다에 떠있는 섬, 어청도가 무도회장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앙코르에 앙코르가 이어져 40분 예정이던 공연이 두 시간 가까이 지나 마무리됐을 때 주민들도, 집단가출호 대원들도 춤을 추느라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어청도초등학교(교장 김명종)에 갖고 있던 오카리나와 도서를 선물하고 이튿날 아침 오카리나 강습까지 해준 뒤 어청도를 떠날 때 이별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김미숙, 조은주 대원과 그 새 정이 들어 “이모, 우리랑 그냥 여기에 살면 안돼요?”라며 매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은 우리 앞에 있고, 우린 독도를 향해 그 길을 계속 가야했다.
 

어청도 항을 벗어난 집단가출호는 서풍을 받으며 남진, 낮 12시께 십이동파도에 접어들었다. 12개의 섬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십이동파도는 자연환경 보존을 위한 특정도서로 지정되어있는 곳. 해안절벽의 경관이 빼어난데다 물이 맑아 서해 최고의 스쿠버다이빙 포인트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파도가 빚어놓은 기기묘묘한 해안절벽 위로 해송과 억새를 가득 이고 섬은 초록색으로 빛났다. 섬들 사이사이로 배를 몰며 숨이 멎을 것 같은 경치에 넋을 잃은 탓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고 말았다. 서둘러 항해를 재개했지만 오늘의 목적지 안마도는 아직 50km도 더 남은 거리다.

긴급회의가 열렸다. “오늘 밤 초생달이지만 별빛이 좋을 텐데… 상왕등도에서 저녁 먹고 야간 항해로 목포까지 내리 쏘는 게 어때?” 허 선장의 낭만적인 별빛 세일링 제의에 모두들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상왕등도는 방파제가 없어 겨울 북서풍에 속수무책이어서 4월부터 10월 말까지만 어민들이 살고 겨울엔 무인도가 되는 작은 섬이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상왕등도에 배를 붙였다. 1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에 주민 수에 육박하는 12명의 대식구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 것이다. 주민 서앵순 아주머니(64)에게서 밥과 반찬을, 노상기 이장님(54)으로부터는 장어를 구입했다. 손이 빠른 아주머니 서너 분이 달려들어 30여 분 만에 식사가 마련됐다. 마침 주민들도 식전이어서 선착장에 멍석을 깔고 마을 전체의 만찬이 벌어졌다.

멸치젓갈을 많이 넣어 갓 담은 배추김치와 곰삭은 달래김치, 밴댕이젓, 그리고 쌀뜨물에 고춧가루를 풀어 끓인 장어탕. 임금님도 부럽지 않은 밥상이었다. 이곳은 양식장이 없어 생선이건 패류건 자연산이다. 잡은 고기는 어창에 살려뒀다가 3~4일에 한번 격포로 가서 수협에 넘긴다.
말이 나온 김에 상왕등도에 단 두 명뿐인 해녀가 잡은 자연산 전복을 구입해 초장을 곁들이자 그 맛에 모두들 비몽사몽이다. 게다가 노병업 이장님이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만 해서는 체면이 안 선다며 가져온 삶은 문어를 참기름 소금에 찍어먹는 맛은 극상의 식도락을 안겨줬다.

음식만화를 연재 중인 허 선장은 사진 촬영과 메모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밤 10시 30분, 자고 가라는 주민들의 따뜻한 권유를 힘겹게 뿌리치고 상왕등도를 떠나 암흑의 밤바다로 나아갔다. 상왕등도 사람들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선착장을 서성였다. 밤이 되고 바람에 다소 힘이 실려 배는 목포를 향해 남쪽으로 순항했다.

약 130km를 밤새도록 달려야하므로 대원들을 휴식조와 항해조 2개 팀으로 편성했다. 밤바다는 몹시도 고요해 돛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뱃전에 물결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또렷했고, 별 총총한 하늘에선 가끔씩 유성이 긴 꼬리를 남기며 검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간다.

야간 항해로 자정을 넘겨 8월 16일. 허영만 선장의 61번째 생일이다.

안마도 등대를 지날 무렵 대원들이 소주 한 병과 말린 생선 몇 점을 놓고 생일파티를 열었다. 허 선장은 “야간 항해 중 생일을 맞는다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닐 것”이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새벽에 안개가 끼기 시작해 교대 투입된 팀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암흑의 수평선은 안개 속에서 가물거리는 가운데 바람과 함께 빠른 조류를 탄 집단가출호는 시속 6노트로 남진했다. 야간 세일링은 낭만적이지만 위험 요소도 많다. 어둠 속에서 바다 곳곳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어구를 피하기 위해 뱃머리에 항로 감시를 위해 2명의 대원을 배치했고, 레이더를 가동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임자도 등대가 보일 무렵에야 동이 터 올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항로가 섬들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목포 해역에 진입했을 땐 해가 높이 떠올랐다. 높이 솟은 태양은 몹시도 뜨거워 이제 집단가출호가 뜨거운 남도의 초입에 진입했음을 상기시켰다.

이번 3차 항해의 최종 목적지인 목포항 삼학도 마리나에 접안한 것은 낮 12시. 상왕등도를 떠난 지 13시간 30분만이었다.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송철웅
사진 |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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