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여기 보기 힘든 유물이 꽤 있네. 쌍계사 고승들 초상화 같은 건 일부러 찾아가서 보여 달라고 하지 않으면 보기 힘든 건데….”
7일 오후 4시 반, 경남 진주시 진주성 내 국립진주박물관 앞에 ‘두류(頭流·지리산의 다른 이름)고전연구회’ 회원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디지털렌즈교환식(DSLR) 카메라를 멘 최석기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장은 일찌감치 도착해 박물관의 ‘지리산’ 전시를 한 차례 둘러본 뒤였다.
두류고전연구회는 최 원장이 경상대 한문학과 출신 학자들을 모아 1998년 시작했다. 80여 편에 이르는 15∼20세기 지리산 유산기(遊山記)를 모두 번역해 책으로 펴내는 게 목표다. 회원은 8명이다. 2001년 첫 책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돌베개)을 낸 뒤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3’(보고사)을 냈다. 전체 유산기 중 40여 편이 담겨 있다.
유산기는 산을 유람한 동기와 목적, 보고 들은 것, 감상 등을 기록한 기행문학을 가리킨다. 유교에서 ‘요산요수(樂山樂水)’를 강조한 만큼 주로 조선시대 때 유학자들이 많이 남겼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제일의 산일 뿐만은 아니다. 비록 이 세상의 그 어떤 큰 산이라 할지라도 이 산과 대등할 만한 산은 없을 것이다.”(송광연 ‘두류록’ 중에서)
지리산의 경우 남명 조식, 점필재 김종직 등 전라도와 경상도의 여러 유학자가 유산기를 남겼다. 남명은 지리산 덕천동(지금의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서 은거하기도 했다.
당대의 산행은 단순히 경치를 즐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특히 지리산의 경우 당쟁의 와중에 낙향하거나 좌천된 재야인사들이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고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자주 올랐다.
최 원장은 “지리산이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세계관을 품고 있기 때문에 유산기에서 당대 유학자들의 내면세계가 잘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유산기에는 불교나 무속신앙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는가 하면 지리산 인근 백성들의 힘든 삶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신을 담기도 한다. 강정화 경상대 HK연구교수는 “다양한 사상이 등장하고 지리산 신선이라 불렸던 신라시대 최치원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언급도 많아 한문 번역 외에도 당대의 사상이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며 “국어나 한자사전은 물론이고 당대 유학자들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찾아봐야 하기 때문에 연구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모임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날 모임은 촉석루에서 경상대 남명학관으로 옮겨 내년 여름에 출간할 예정인 지리산 유산기 4권에 관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 책은 유산기 각각의 등산 경로를 그린다. 필자들이 직접 산에 올라 사진을 찍어 싣는다. 실제로 ‘지리산 아흔아홉골’(www.jiri99.com)이라는 인터넷 등산모임은 책에 나오는 유학자들의 경로를 따라 지리산에 오르기도 한다. 최 원장이 이 모임과 함께 산을 오르며 강의를 하기도 했다. 최 원장은 “번역에 그칠 게 아니라 책을 내야 학자들의 역량도 높아지고 일반인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유산기를 보고 지리산을 오르면 그냥 등산을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지리산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역사를 체험할 수 있죠. 선조들의 기개와 정신세계도 느낄 수 있고요. 이렇게 우리 역사와 문화를 좀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저희 번역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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