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카페]옷장 정리하며 찾아낸 ‘참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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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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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사소했다. 옷장 속에 꼬불쳐놨던 꽃무늬 망사 스타킹을 찾는 일이었다. 일은 커졌다. 내친 김에 주말을 다 바쳐 ‘옷장 속 재구성’에 나섰다. 결과물을 본 남편은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라고 했으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여자에게 있어 옷장 정리는 성스러운 자기 성찰 의식에 가깝기에.

여간해선 옛날 옷을 잘 버리지 않는 내게 옷장은 추억과 시대의 아카이브(창고)다. 대학 시절 온 동네 바닥을 휩쓸던 통 넓은 바지, 한껏 싱싱한 몸매를 자랑하던 랩 원피스…. 태산까진 아니어도 꽤 높은 구릉을 이루며 쌓인 옛날 옷들은 그렇게 가만히 말을 걸어온다. 비록 1년에 한 번 내 손에 간택될까 말까한 슬픈 운명일지라도.

옷장 정리는 결국 옷의 재배열이다. 유행과 심리 상태, 체형 변화에 따른.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아나운서 차림의 정장을 고수하던 난 최근 몇 년 동안 옷의 긴장감을 덜어내는 데 지나치게 심취했었다(실은 당시엔 이런 풍조가 멋 꽤나 낸다는 남녀에게 최첨단 유행이기도 했다). 몸을 자유롭게 하는 옷을 입겠다며 재킷 대신 니트를 걸쳤다. 증상은 심해졌다. 심신의 평화를 찾겠다며 콘택트 렌즈를 빼고 눈이 팽팽 돌아가는 안경을 꼈더니, 화장도 생략하고 ‘몸뻬’ 치마까지 입게 됐다. 눈높이도 한 뼘이나 추락했다. 이런 차림새에 하이힐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긴장이 없는 삶은 나태를 가져온다. 나태한 옷차림에 몸의 긴장감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이번 시즌 패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꽃무늬 스타킹을 찾아 나섰던 건 일종의 자기 경고음이었으리라. 더는 내 삶의 무긴장 상태를 방치할 수 없다는…. 핑계가 없지는 않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이 땅의 엄마의 삶은, 비록 엄마가 패션에 무한 애정이 있다 해도 녹록지 않다. 초등학생 딸을 둔 한 호텔리어는 자신을 대신해 방과 후 아이를 돌볼 당번 표를 매주 시댁과 친정에 보내는 애달픈 수고까지 하고 있었다.

이번 옷장 정리의 콘셉트는 ‘참한 여자’였다. 몇 년 전 ‘믹스 앤 매치’와 ‘드레스다운’이 휩쓸고 간 자리를 당당하게 꿰찬 클래식 패션은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하는 정숙한 여인의 모습이다. 단정한 스커트와 실크 블라우스, 질감 좋은 캐멀 코트. 꽃무늬 망사 스타킹은 왠지 설레는 날 꺼내 신어야겠다. ‘옷은 곧 사람’이란 명제는 아주 많은 경우에 들어맞는다. 행여나 내가 만사가 귀찮은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다면 누군가 내 손을 꼭 잡고 말려줬으면 좋겠다.

김선미 산업부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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