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 사대부들은 어떻게 교류했나’ 논문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반대 당파와도 수시로 술자리
유배가면 반드시 찾아가 위로

조선 중기 사대부가 모두 붕당(朋黨) 내에서만 교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학맥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과도 광범위한 인적관계망을 구성함으로써 가문의 입지를 더 탄탄히 다지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근호 국민대 국사학과 연구교수는 17세기 전반 서울의 사대부 이유간 가문이 남긴 ‘세구록(世舊錄)’을 분석해 당시 조선사회의 사교 일상을 들여다본 논문 ‘17세기 전반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인적관계망’을 29일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정례발표회에서 발표한다.

이유간과 그의 아들 이경직은 전주 이씨 덕천군파의 일원으로 지금의 서울 충정로 일대에서 세거하던 가문이었다. 17세기 인조반정을 계기로 집권하게 되는 서인세력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세구록’은 1764년경 자손들이 선조의 친교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엔 이 부자가 교류한 인물 404명이 등장한다. 이 교수는 “인물별로 교제를 하게 된 배경과 교류 활동이 기록돼 있다”며 “서인의 주류였음에도 당파를 달리한 우복 정경세와 자주 술자리 모임을 하는 등 당파성을 초월한 인적관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광범위한 교류는 17세기 전반 정치적 격변기에 서로를 도와주는 안전장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교 덕분에 이유간의 아들 이경직은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에 오르고, 또 다른 아들인 이경석은 영의정에 오른다.

교류의 양상도 흥미롭다. 일상적인 교류는 세시에 반드시 왕래를 하고 평소에는 인편을 통해 안부를 물으면 상대는 노비를 보내 안부를 되물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아들을 동석하기도 했다. 부자가 참석하는 사교 모임은 대를 넘어 이어졌다고 한다.

상대의 애경사는 세심하게 챙겼다. 지방 관직에 나가거나 유배를 가게 됐을 때는 반드시 찾아가 배웅하거나 위로했다. 광해군 말년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됐을 때 이유간은 명을 기다리고 있던 이항복에게 조석으로 음식을 보냈고, 유배지로 떠날 때에는 교외로 나가 악수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병이 들면 죽이나 약재를 보내 쾌유를 기원하기도 했다.

유통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 사대부들은 선물을 통해 상대방의 경제생활에 도움을 줬다. 임지에서 나는 생선이나 고기를 보내고 답례품을 꼬박꼬박 보낸 기록이 꼼꼼히 남아 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