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멀쩡한 한옥 부수고 새 한옥 짓나요”

  • 입력 2009년 6월 10일 02시 51분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의 한옥들을 지키려는 소송에서 이긴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 씨. 그는 유럽 선진국은 작은 고택 하나도 함부로 헐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의 한옥들을 지키려는 소송에서 이긴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 씨. 그는 유럽 선진국은 작은 고택 하나도 함부로 헐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동소문동 한옥마을’ 지킨 미국인 바돌로뮤 씨

서울행정법원이 4일 한옥이 밀집한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일대의 재개발 사업 추진 절차에 하자가 있다며 서울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 씨(61) 등 주민 20명의 손을 들어줬다.

1년 7개월여 만의 승소. 바돌로뮤 씨는 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그간의 우여곡절이 떠올랐는지 침묵하다 “속시원하다”고 말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번 판결로 한옥 보존에 대한 공감대가 생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책에 얼마나 반영되느냐가 더 중요해요. 지난해 말 서울시가 한옥 밀집지역 중 재개발이 예정된 곳은 한옥 보존을 전제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그 전에 이미 서울의 상당수 한옥 밀집지역에 재개발사업 허가가 난 것에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아요.”

재판이 진행 중이던 6개월 전 동소문동 자택에서 만났을 때(본보 2008년 12월 17일자 A12면 참조)처럼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그는 “집을 오래된 냉장고나 TV 버리듯 하는 곳은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바돌로뮤 씨는 이번 판결에서 법원이 한옥의 보존 가치 그 자체에 주목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법원은 동소문동 재개발구역의 노후 불량률이 법령이 정한 기준(60%)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한옥의 보존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노후하거나 불량한 건축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바돌로뮤 씨는 “동소문동이 ‘한옥은 허물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을 바꾸는 본보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동소문동의 경우 과연 한옥이 실제로 노후한 건물인지 과학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재판을 시작한 이후 바돌로뮤 씨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한 것은 그의 한옥 사랑을 “돈 많은 외국인의 여유”라며 그 때문에 한옥을 수리할 돈이 없는 가난한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비난이었다. 재판에 이긴 뒤 기자들이 찾아왔던 4일에도 집 밖에서는 재개발을 추진하는 이들이 시위를 벌였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재개발 예정지에 있는 한옥을 임차한 젊은 캐나다 친구도 부자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살기 위해 망치질을 하다 손가락을 다쳐가며 직접 한옥을 보수합니다. 미국과 유럽인들은 오래된 건물을 고쳐 쓰는 것에 익숙합니다.”

바돌로뮤 씨는 한옥을 보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광복 이후 한국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문제를 지적했다. 짧은 시간에 첨단도시가 형성되면서 전통건축의 맥이 단절되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지은 100년밖에 안 된 한옥이라도 지금은 잇기 어려운 조선시대의 귀한 건축 전통이 남아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을 없애는 일은 과거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단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한옥이 잘 남아 있다는 서울 종로구 북촌을 가보니 멀쩡한 오래된 한옥을 부수고 원형과 상관없는 새 한옥을 짓고 있더군요. 새 집에 사는 것만이 행복한 건 아니지 않나요?”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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