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우리 것’ 지켜온 그들을 우리는 잊었다

  • 입력 2009년 5월 30일 02시 58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양태(갓의 테)장 기능보유자였던 고정생 여사(1992년 작고)가 갓의 테를 만들고 있다. 저자는 문화유산 사진작가인 김대벽 선생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고 여사와 같은 한국의 인간문화재 1세대를 만났다. 사진 제공 현암사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양태(갓의 테)장 기능보유자였던 고정생 여사(1992년 작고)가 갓의 테를 만들고 있다. 저자는 문화유산 사진작가인 김대벽 선생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고 여사와 같은 한국의 인간문화재 1세대를 만났다. 사진 제공 현암사
◇장인/박태순 지음·김대벽 사진/376쪽·1만8000원·현암사

전국 방방곡곡 무형문화재 匠人20명의 기록

“명장에 대한 푸대접은 한국이 가장 세계적”

《이 책 20편 글에 등장하는 전통 장인 중 14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책 속 장인 사진 220장을 찍은 문화유산 사진작가 김대벽 선생도 2006년 작고했다. 소설가인 저자와 김대벽 선생이 방방곡곡 장인들을 기록한 것이 1980년대다.

그러나 이 책은 20년 전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글을 고치고 새로 썼다. 과거 글도 오히려 지금은 육성을 들을 수 없는 중요무형문화재 1세대들의 사연 많은 삶과 속내, 자긍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소중한 사료로 다가온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2호 곡성 돌실나이(‘돌실’은 전남 곡성군 석곡면의 ‘석곡’에서 유래했고 ‘나이’는 길쌈을 가리키는 토속어) 기능보유자였던 김점순 여사(2008년 작고)는 남편과 아들의 ‘뒷바라지 인생’을 살면서도 길쌈에 “한갓지게 외곬으로 파고든” 덕분에 장인으로 존경받았다. 》

김점순 여사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몰래 베를 짰고 “너는 이런 일 하지 마라”는 어머니의 매를 맞으면서도 베틀에 매달렸다. ‘한량 남편’의 무관심으로 한 많은 시집생활을 47년 하며 길쌈으로 집안 살림을 꾸렸다. 1960년대까지도 길쌈은 집안에서 늘 해오던 일이었는데 1970년대 이후 김점순 여사를 뺀 거의 모든 집이 베틀을 없애버렸다. 정부가 가정의례준칙을 시행하면서 상복으로 쓰던 삼베옷의 수요가 끊겼고 당시 일어난 대마초 사건으로 삼베옷의 재료인 대마 재배가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김점순 여사는 길쌈 실력을 인정받아 1982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초청을 받기도 했다. 저자는 “물레와 길쌈에 어린 여인애사(女人哀史)야말로 5000년 역사의 삶을 잣고 날고 매고 짜서 지켜 온 생활문화의 응어리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탈 제작 기능보유자였던 천재동 선생(2007년 작고)이 만든 말뚝이(양반들의 무능력과 부패를 고발하는 하인) 탈에서 한국인의 웃음을 얘기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인의 웃음은 대단히 풍요로워서 증오, 분노, 갈등, 인생고(苦)도 웃음 속에 꾹꾹 눌러 담아낸다. 가면에서는 “어떤 고난이 닥쳐도 부정과 불의에 맞서 낙천적으로 참 세상을 추구해 나가는” 말뚝이가 그 전형이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 선생은 천재동 선생의 탈을 보고 ‘큰 바가지는 엉둥이로 웃고/작은 바가지는 배때지로 웃고 있다/千在東(천재동)의 바가지가 그렇듯이/밝은 날도 흐린 날도/절대로 절대로/울지 않는다’(‘절대로 절대로’ 중에서)라고 노래했다. 천재동 선생의 “예술은 절망, 고통마저 웃음으로 만든 한국인의 표정을 현대에 되살려낸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였던 김근수 선생(2009년 작고)으로부터는 유기(놋그릇)의 굴곡 많은 역사를 듣는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전쟁 준비를 하며 한국의 유기를 모아 반출하려 인천 부평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미군의 공습으로 일본으로 가지 못한 채 광복이 됐고 유기 공장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인기를 끌던 유기 제품은 장작 대신 구공탄이 에너지원으로 쓰이면서 위기를 맞았다. 가스에 시꺼멓게 변하는 놋그릇은 생활용기로 부적절하다는 판정을 받은 것. 그런데 1980년대 가스레인지가 보급되면서 스테인리스강 제품이 오히려 싸구려 처지로 전락했고 유기는 환경 지킴이 제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장인들의 작업은 시간과의 싸움.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 후보였던 김기원 선생(1988년 작고)은 “활 하나 만들자면 최소한 넉 달은 걸리고, 700∼800번 손이 가야 한다. 그러니 여러 사람이 거들어서 1년에 80∼100개 만들기도 벅차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인들을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칠기장 기능보유자였던 김봉룡 선생(1994년 작고)은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나전칠기로 제작한 화병으로 은상을 받았고 평생 사람과 문화를 섬기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그 자신은 섬김을 받지 못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김대벽 선생은 “사람을 위할 줄 모르는 한국 사회” “명장에 대한 푸대접은 한국이 가장 세계적일 것”이라고 탄식했다.

저자는 책을 내놓으며 새로 쓴 해제에서 “유형문화재의 보존 보호에는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무형문화 보유자에 대한 지원은 최저생계비 수준”이라며 “여러 까다로운 조건과 의무를 담뿍 짐 지우게 한” 무형문화재 정책을 안타까워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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