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관하여 20선]<14>결혼은, 미친 짓이다

  • 입력 2009년 5월 19일 02시 55분


◇결혼은, 미친 짓이다/이만교 지음/민음사

《“네가, 너 같은 스타일이 결혼하면 신랑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결국 네 결혼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일종의 간통 미수죄야.” “난, 자신 있어.” 단호하게, 그녀가 덧붙였다.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

결혼의 상투성에 침을 뱉다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나’는 친구 결혼식 사회를 봐주는 보답으로 ‘그녀’와 소개팅을 하게 된다. 첫 만남에서 차 마시고, 영화 보고, 저녁을 먹으며 통속적 맞선 절차를 밟아가다가 술 먹고 여관으로 직행하면서 두 사람의 ‘건전한 홈드라마’ 같던 맞선은 순간 ‘포르노’로 돌변한다. 그 후 ‘그녀’는 ‘나’와의 섹스를 즐기지만 결혼상대로는 망설인다. ‘그녀’는 “내 손엔 다섯 개의 대본이 쥐여 있다”면서 의사와 두 명의 회사원, 연구원, 그리고 ‘나’를 놓고 저울질한다.

2000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이 장편소설은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도발적이다. 주인공 ‘나’와 ‘그녀’를 비롯해 소설 속 인물을 보면 결혼에서 신성한 의미를 찾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그녀’는 조건을 보고 돈 많은 의사와 결혼하지만, 격주로 ‘나’의 자취방으로 찾아와 섹스를 하고 관계를 이어간다. ‘나’의 여동생은 유부남과 몰래 살림을 차리고, ‘나’에게 사회를 부탁했던 친구도 임신한 아내 몰래 옛 애인과 만난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나’와 마치 주말부부처럼 행동한다. 자취방은 아기자기한 신혼 살림살이로 채워진다. ‘그녀’는 자취방에서의 첫날 모습부터 새댁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까지 일상을 사진에 담아 신혼 사진 일기를 쓰듯 앨범 꾸미기에 열중한다. “…날이 갈수록 아무런 죄책감도 느껴지지가 않아. 그냥 언젠가 네가 말한 것처럼 두 개의 드라마에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는 것 같을 뿐이야. 그래서 남들보다 약간 바쁘게 살아가는 듯한 느낌뿐이야.”

저자는 이 소설에서 결혼을 ‘경제적 손익계산표를 바탕으로 한 거래’로 본다. ‘나’는 ‘그녀’가 맞선을 보고 온 부유한 의사에 대해 “못생겼어”라고 말하자 “안성맞춤”이라고 대꾸한다. “마음에 드는 물건일수록 오래 들여다보아야 해. 흠집이 없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찾기 위해서지. 흥정할 때 유리해지거든.”

스피디한 전개, 재치 있는 문장, 묘사 대신 대사 위주로 이루어진 덕분에 이 소설은 쉽게 읽힌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기혼녀와 미혼남의 흔한 불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저자는 냉소적인 대학 시간강사인 ‘나’의 입을 빌려 오늘날 몰개성화한 결혼 세태를 조롱하고 TV드라마로 상징되는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지배되는 현대인의 삶을 꼬집는다. “내 안에, 언제부터인가, 텔레비전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결혼과 직장 생활은 정해진 대본처럼 상투화되어 가고 있다.”

소설 말미, ‘그녀’와 다투고 헤어진 ‘나’는 ‘그녀’가 자취방에 남기고 간 앨범을 보며 그제야 깨닫는다. 사진 속의 삶은 그녀가 가보고 싶어 했던 ‘또 하나의 길’이라기보다는 그녀와 그가 ‘갔어야 했던 길’임을. 그는 “어쩌면 그녀의 사진 찍기는 현실을 견디고 싶어 하는, 안간힘으로서의 ‘드라마 요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낭만과 신성함이 사라진 결혼을 정면으로 비판한 이 소설은 ‘그녀’가 ‘나’에게 들려주는 무명시인의 시를 빌려 결혼의 소박한 의미를 슬쩍 드러낸다. “세상에 제일가는 보물을 얻었으니/어디에 방 하나 있었으면./그녀가 살금살금 나와서 키 작은 대문을 따준다면./샘터를 돌아 뒤란을 지나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으나/정숙한 그녀같이 속으로 더욱 따듯한 온돌방이었으면….”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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