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없는 인문학, 창조경영 답을 주다

  • 입력 2009년 4월 27일 02시 58분


서울대 개설

‘CEO 인문학 과정’

책으로 나와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올림픽,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은 뒷전에 밀렸습니다.

과학, 경제, 경영이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 착각했지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서 답보하는 것은 ‘창조 경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을 경시한 결과라고 봅니다.”》

지난해 3월 4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서울대가 2007년 개설한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AFP)’ 제2기 입학식에서 당시 이태진 서울대 인문대학장은 경영인 40여 명에게 인문학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중세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가 말한 ‘원천으로(Ad Fontes)’라는 명구(名句)에서 따온 AFP(Ad Fontes Program)는 2기 입학 경쟁률이 3 대 1에 이를 정도로 인기였다.

김기열 KTF 부사장, 김낙회 제일기획 대표이사, 문대원 동화산업 회장, 민경조 코오롱그룹 부회장, 서승화 한국타이어 대표이사,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등과 함께 2기 과정을 수료한 고승철 전 동아일보 출판국장이 31개 강의를 요약해 ‘CEO 인문학’(책만드는집)을 펴냈다. “명품강좌를 일부만 듣기엔 아깝다는 생각에서 책으로 냈다”는 저자의 설명대로 문학 역사 철학 등 인문학의 각 분야를 아우르는 내용이 짧지만 알차게 요약됐다.

○ ‘열하일기’ 세계화시대에도 맞는 고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안동 유교 문화권의 역사적 연원과 의미’라는 강의에서 ‘유교 망국론’을 비판했다. 그는 “성리학은 케케묵은 학문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질서를 종합한 학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리더십’을 강의한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는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업적으로 호전적 노동조합을 격파하고 노사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영국병’을 치유한 사실을 꼽았다. 김명호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강의에서 “세계와 소통하면서도 고유 가치를 지키는 것이 화두인 요즘 선진 문물을 연구한 연암의 ‘열하일기’는 그에 훌륭하게 응답하는 고전”이라고 소개했다.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문학과 인생’이란 강의에서 “학문에 굳이 서열을 매기자면 인문학의 경우엔 인간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학이 첫째”라고 말했다. 황경식 서울대 교수(철학)의 ‘현대사회와 윤리’ 강의에는 “화두만 여럿 던졌는데 철학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하는 수강생의 질문이 나왔다. 이에 황 교수는 “철학의 특징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4대 성현 가운데 공자, 석가모니, 예수 등 종교를 창시한 분들은 정답을 던진 반면 소크라테스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창조 경영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강의한 조동성 서울대 교수(경영학)는 빙설제를 통해 관광지로 거듭난 중국 하얼빈, 세계경제포럼 개최로 유명해진 스위스의 다보스 등을 들며 “훌륭한 지도자는 불리하다고 여겨진 문제점들을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극복해 비전을 달성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사람을 관리 대상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수강생들은 입학식 때 “인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고갈된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경영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할 소재를 배우기 위해서” 등의 수강 이유를 밝혔다. 지난해 7월 15일 수료식 때 제2기 원우회장인 윤동한 회장은 “효율, 능률을 따지는 경영 현장에서 수십 년 지내온 사람으로서 이번 과정을 통해 사람을 관리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저자는 미국의 로펌에서 일하는 한국인 변호사로부터 들은 사례를 소개하며 경영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거듭 강조했다. 이 변호사가 참석한 어느 저녁 자리에서 미국 유통업체의 임원과 한국인 지사장은 둘 다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인은 반가운 마음에 제임스 조이스, 존 업다이크에 대해 얘기를 꺼냈지만 한국인 지사장은 아무런 맞장구도 못 쳤고 결국 계약에 실패했다. 이 변호사는 “제임스 조이스가 지은 ‘율리시스’만 읽었더라도 5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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