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 이들이 있기에 살아 숨쉰다

  • 입력 2009년 4월 21일 02시 57분


《‘궁궐 지킴이’ 김기억 씨(76)는 평일보다 주말이 더 바쁘다. 그는 10년째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서울시내의 고궁을 누빈다.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 등 서울시내 5대 궁궐이 그의 활동 무대다. 고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정년퇴직한 김 씨는 임금이 살던 궁궐이 언젠가부터 공원으로 뒤바뀐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교사 시절 틈틈이 궁궐의 역사를 공부한 덕에 퇴직 무렵에는 어느덧 궁궐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고종은 이곳 함녕전서 최후 맞아”
해설 예약하면 언제든 현장 출동

하루 3번 교대식 주 6일 근무
“문화유산 지키는 자부심 커요”

그는 “궁궐은 단순히 거니는 곳이 아니라 숨겨진 역사를 체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궁궐가이드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역사 해설을 원하는 사람들의 예약이 있을 때마다 그는 궁궐로 달려간다. 김 씨처럼 고궁이나 왕릉에서 ‘역사 지킴이’ 자원봉사를 하는 ‘궁궐 사람’들은 300여 명이나 된다.

○ 우리 역사 이야기꾼, 궁궐 지킴이

주말인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의 덕수궁 안. 김 씨는 고종이 망국의 한을 이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둔 함녕전(咸寧殿) 앞에서 “고종이 당했던 수모를 잊지 말자”며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궁궐을 헐고 크기도 줄였다”고 열변을 토했다. 20여 명의 학생은 김 씨의 설명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수첩에 깨알같이 적었다.

김 씨는 석어당(昔御堂)으로 옮겨 이야기를 계속했다. 석어당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했던 곳이다. 김 씨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인목대비는 자기가 수모를 당했던 이 석어당에서 광해군의 죄를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학생들은 반전을 거듭하는 역사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서울 강신중학교 역사탐구반 조현진 양(14)은 “매일 지나치는 궁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 궁궐을 지키는 숨은 손길들

월요일은 제외하고 덕수궁에서는 하루 3번씩(오전 11시, 오후 2시, 3시 반) 수문장 교대식이 열린다. 경복궁에서는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매시간 정각에 열린다(오전 10시∼오후 4시).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사진 촬영 코스인 수문장 교대식에 나서는 사람들도 궁궐 지킴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칼과 깃발을 들고 궁궐을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 계약직 배우다. 생계유지나 등록금 마련을 위해 이 일에 뛰어든 20대가 많다. 하지만 연극만으로는 벌이가 시원찮아 찾아온 30대 연극배우나 사업에 실패한 40대 가장도 있다. 배우들은 주 6일, 하루 3차례 행사를 하고 한 달에 기본급으로 120만 원가량을 받는다.

수문장 역할을 맡고 있는 고병관 씨(24)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 서 있다 보면 힘들 때도 많지만 문화유산을 지켜 나가는 자부심이 더 크다”고 말했다.

궁궐 전역을 누비는 숨은 일꾼도 많다. 기능직 공무원들은 순찰·방호·안전관리 업무를 맡고 공익근무요원은 이들을 보조한다. 덕수궁관리소 측은 “그래도 요즘은 시민들의 문화의식이 높아지면서 일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김기억 씨와 같은 궁궐 지킴이의 역사 해설을 들으려면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홈페이지(www.palace.or.kr)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10명 이상이 신청해야 하며 주로 금요일과 토요일에 궁궐을 방문하게 된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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