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엄마 이해못하는 딸들을 위하여

  • 입력 2009년 4월 3일 03시 02분


극단 산울림 창단 40주년 기념작 연극 ‘엄마는…’

엄마(박정자)는 물려주고 싶었다. 20년 된 꽃무늬 실크 블라우스, 촌스런 밤색 바지 그리고 외출 때만 입었던 보라색 ‘뽕브라’까지.

무엇보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당신의 자리를 딸(서은경)이 해주기를 원했다. 사별한 남편, 캐나다로 떠나버린 아들, 엄마에게 남은 건 딸 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딸은 싫었다. 무엇보다 내 삶을 꿰뚫어보려는 엄마의 눈빛이 불편했다. 모성이라는 굴레로 딸의 인생을 옥죄는 엄마의 고집은 결국 딸을 벗어나게 만든다.

극단 산울림 창단 40주년 기념작으로 공연 중인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드니즈 샬렘 작·임영웅 연출)는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인 딸이 엄마의 차가운 주검을 마주하며 시작된다.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딸이 엄마와 만들었던 따뜻한 추억들을 불러내는 회상 구조의 2인극이다.

박정자 씨는 1991년 실제 50세 때 엄마 역을 처음 맡은 후 8차례나 같은 역할로 무대에 섰다. 18년간 오지혜 오미희 우현주 길해연 정세라 등 극중의 딸들을 떠나보낸 그의 나이도 어느 덧 67세. 이번 작품에서 딸 역을 맡은 서은경 씨와는 무려 서른다섯 살 차이가 난다. 이번 공연에는 낡은 타자기와 엄마의 촌스런 화장, 원피스 등 작품의 소품들을 대부분 바꾸지 않은 채 이전 것 그대로 가져왔다.

자리를 가득 메운 대부분의 관객들은 50대 중년 여성들이었다. 모녀할인 혜택 덕택인지 모녀가 함께 온 관객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작품이 초연했던 19년 전과 비교하면 모녀가 겪는 갈등에 공감할 모녀관객이 과연 얼마나 될까. ‘워킹 맘’인 딸을 위해 손자를 돌보는 것도 꺼리는 ‘뿔난 엄마’들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애 안 낳는 여자는 여자가 아닌 거야’라고 주장하는 엄마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딸의 대립은 자칫 진부해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작품이 결국 전하고자 하는 모성은 여전히 빛난다. 특히 박 씨의 엄마 연기는 녹슬지 않았다. 되레 세월이 갈수록 더욱 진해졌다. 딸을 미국으로 보낸 후 혼자서 생일 상을 차리는 엄마의 장면에서는 객석 여기저기가 훌쩍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며 어느새 엄마와 서먹해진 딸들을 위한 연극에 가깝다.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정녕 유익한 일인가”라고 말하는 딸의 늦은 후회에서 젊은 여성 관객들은 고개가 숙여진다.

식어버린 엄마의 주검. 뒤늦게 돌아온 딸은 썩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엄마, 나도 늙었죠?” 공연이 끝난 후 엄마의 대사가 머릿속을 계속 울린다. “너는 이 다음에 너만큼 못된 딸년을 둬봐야 내 맘을 알거다. 하지만 그땐 너무 늦었을 것. 나는 무덤 속에 있을 테니.” 역시 딸들의 후회는 언제나 늦다. 5월 10일까지 서울 마포구 산울림 극장. 2만∼4만원. 02-334-5915

염희진 기자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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