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추기경 김수환의 ‘장엄한 낙조’

  • 입력 2009년 3월 11일 03시 00분


드러내놓고 말은 안하지만 모두들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40만 명의 자발적 추모 인파가 모인 ‘명동의 기적’, 그리고 ‘추기경 신드롬’ 때문이다. 천주교 수뇌부도 인정하다시피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식은 자신들도 ‘깜짝 놀랄 만큼’ 감동적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서울대교구장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국민장이나 다름없는 추모와 애도의 물결 속에서 한 성직자의 장례가 치러진 것이다.

구심점 없는 개신교계의 반성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아무래도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개신교계일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김삼환 목사(명성교회)는 “생전에 고인을 찾아뵙고 상호 협력 방안 등에 대한 고언을 구할 생각이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며 “교파를 떠나 김 추기경의 ‘청빈’과 ‘겸손’ ‘개혁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기경 빈소에 조문을 다녀온 교계 지도자는 “국민들은 김 추기경의 선종을 오래전 신익희 조병옥 선생과 같은 지도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면서 “한국 개신교의 시야가 교회 ‘안’으로 치우쳐 ‘밖’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한 현실을 숙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류 교단의 신학자는 “솔직히 개신교계를 통틀어 그만한 인물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라며 “각 교단, 교파로 분열돼 있는 개신교 구조상 그런 큰 지도자를 배출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개신교도 천주교 못잖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복지 사업에도 헌신하고 있으나 구심점이 없는 상태”라며 “목회자는 모름지기 김 추기경과 같이 광야에서 외치는 존재로 그쳐야 하는데, 고 한경직 목사를 제외한 K, M, C, S, I, K 씨 등 유명 목회자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친정부적이거나 과도한 현실 참여를 한 것은 유감”이라고 언급했다.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직을 은퇴한 후 “한 번도 상왕(上王) 노릇을 하지 않았다”고 한 정진석 추기경의 회고도 새겨들을 만하다.

개신교계 진보적 인사들은 또 한국의 전통을 포용한 천주교의 장례의식을 높이 평가하면서 “개신교회도 조상제사 등의 전통의식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소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각국의 문화적 전통을 존중해 온 관례에 따라 유교적 장례 예식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허용하고 있다. 반면 개신교는 이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 가족과 세대 간에 갈등을 불러오고 비기독교인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데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계도 ‘김 추기경처럼 잘 살다 가야 한다고 느꼈다’는 이가 많다. 20여 년간 김 추기경과 민주화 운동을 함께해온 월주 스님과 지관 총무원장을 비롯한 조계종 총무원 간부들도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월주 스님은 “김 추기경은 온 국민의 추앙을 받을 자격이 있는 성직자의 삶을 살아오셨다”고 추모하면서 “성철 스님이 열반했을 때는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큰 호응이 있었지만 김 추기경에 대한 애도는 세대 이념 종교를 넘어섰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불교계 “소박한 장례절차 감명”

불교계 한 중진은 특히 “엄숙 경건 소박한 장례 절차와 추기경과 신부를 똑같이 예우하는 천주교 의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돌아가신 어른 스님들에 대한 과도한 추모 행사는 마땅히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통도사 주지 정우 스님은 “통도사 창건 이래 1400여 년 동안 부도는 고작 60개만 세워졌다. 예전에는 한 세대에 1명꼴로만 부도가 세워진 셈”이라고 말했다.

성철 스님 열반 후 남다른 효심(孝心)으로 유명한 문도회를 중심으로 경남 산청 스님의 생가 터에 거창한 절을 짓고, 해인사 경내에 대형 사리탑을 조성한 데 대한 비판 여론이 있었다. 누더기 가사와 장삼, 고무신, 지팡이만 남기신 노장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것이다. 특히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하신 해인사 백련암 고심원(古心院) 실내에 스님의 소조 좌상을 봉안한 데 대해 ‘이건 아니다’라는 얘기도 나온다.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진 추기경 김수환이 한국 종교계에 남긴 교훈과 과제는 넓고도 깊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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