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35>

  • 입력 2009년 2월 23일 13시 33분


노윤상 원장은 탁자 위에 차트를 올려놓은 다음,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카이저 콧수염을 매만지며 굵은 뿔테안경 너머로 환자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세상의 모든 화를 다스리는 앵거 클리닉 원장 노윤상입니다. 클리닉은 어디까지나 조력자고 화를 이겨내는 건 여러분 스스로의 몫입니다. 상담 내용은 모두 녹화되어 치료 목적으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오늘은 앵커 클리닉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가장 최근에 화를 낸 상황을 각자 발표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라면 저 경우에 화를 냈을까 안 냈을까 가늠해보셨으면 합니다. 질문 있으신가요?"

"늘 이렇게 단체로 모입니까?"

근육질 사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오늘과 석 달 뒤 딱 두 번만 함께 모일 겁니다. 상담 전과 후, 변화를 서로 확인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긴 있나요?"

이번에는 뚱뚱보 아줌마다. 효력을 의심하기는 나머지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기쁨, 슬픔, 두려움, 안타까움까지도 감성공학을 통해 수치화하는 세상이 아닌가. 상담은 너무 막연하고 낡은 방식이다.

"최근 5년 동안 앵거 클리닉에서 3개월 스페셜 클리닉을 받은 환자는 모두 3346명입니다. 그 중에서 매우 효과를 본, 그러니까 1년에 화를 3회 이하로 낸 환자는 1122명이며,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그러니까 1년에 화를 10회 이하로 낸 환자는 554명이며, 평균 수준을 화를 내는 횟수를 떨어뜨린, 그러니까 1년에 화를 20회 이하로 낸 환자는 444명입니다. 3346명 중 모두 2120명이 효과를 보았습니다."

"혹시 더 악화된 경우는 없습니까?"

불량 학생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그런 환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 생기겠군."

다시 피식거렸다.

"간단한 샘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진료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개인 사정으로 불참한 박말동 선생과의 상담 화면입니다. 박 선생은 3개월 진료로 화병이 상당히 호전되었습니다. 자, 정면을 보시죠."

화면이 밝아오자, 양 볼에 살이 도톰하게 오른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시작하세요. 박말동 선생님!"

노원장의 목소리다. 말동이 고개를 들며 정면을 쳐다보았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앵거 클리닉에 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들 녀석이라고요."

"아드님 이름이……?"

"승찬입니다. 박승찬!"

"예, 박 선생님. 계속 하시죠. 박 선생님은 이 도시에서 으뜸가는 꽃꽂이 솜씨를 지녔다 들었습니다."

"승찬이는 재주 많은 아이입니다. 대학 시절에는 마그넷 필드 하키 선수였고요. 마그넷 필드 하키 아시죠? 스틱의 자장과 공의 자장을 달리 하여 그 밀치는 힘으로 골을 넣는 시합이죠. 승찬이의 유일한 약점은 화를 자주 낸다는 겁니다. 툭하면 소리를 지르며 대들죠."

"꽃꽂이 가게를 물려받으라고 아드님에게 강권하셨다면서요?"

"강권한 적 없습니다. 의논은 했죠. 딱히 먹고 살만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꽃꽂이 쪽도 고민해보라 권했더니, 화를 내고 가출을 하더니 또 저를 고발하여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앵거 클리닉에 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승찬입니다."

"꽃꽂이를 하라고 매일 백여 차례씩 강권하셨군요. 특히 아드님의 아바타를 도용하여 시크릿 존까지 침투하셨습니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도 이는 심각한 범죄행위입니다."

"승찬이가 자꾸 화를 내니까…… 만나서 화를 풀려고 그랬습니다. 승찬이에게 자주 연락한 건 인정합니다. 허나 그게 제가 앵거 클리닉으로 와야 할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상담은 거기서 끝났다. 아줌마가 물었다.

"화를 낸 건 아들이네요. 근데 왜 박말동 씨가 치료를 받아야 하죠?"

노원장이 즉답을 미루고 좌중을 살폈다. 다들 궁금한 표정이었다.

"답을 드리지요. 화를 내는 방식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상대를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만이 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박 선생님의 분노 성향은 '투사형 공격' 성향으로 보입니다."

"'투사형 공격' 성향? 그게 뭡니까?"

볼테르가 노원장의 마지막 지적을 반복했다.

"화가 난 건 바로 자신인데, 그 화를 상대방이 내고 있다고 뒤집어씌우는 경우죠. 박 선생님은 꽃꽂이 가게를 물려받지 않는 아드님에게 화가 난 겁니다. 헌데 자꾸 괴롭혀서 아드님으로부터 화를 이끌어냈죠. 자, 이런 식으로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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