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삼청동 공공미술 프로젝트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 입력 2009년 2월 23일 02시 54분


골목골목 ‘숨겨놓은 情’ 찾아보기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발견.

높은 축대와 담장으로 이어진

무표정한 골목에서 불쑥 시가

나타난다.

‘잘 잤느냐고

오늘따라 눈발이 차다고

이 겨울을 어찌 나려느냐고

내년에도 또 꽃을 피울 거냐고

늙은 나무들은 늙은 나무들끼리

버려진 사람은 버려진 사람들끼리

기침을 하면서 눈을 털면서’

(신경림의 ‘눈온 아침’)》



반갑고 의아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기면 또 다른 시가 눈에 들어온다. 작은 판에 담긴 김사인의 ‘조용한 일’. 속으로 가만 읽고 나니 그제야 축대에 암각화처럼 새긴 노란 꽃송이들, 사람들 낙서틈에 숨어 있는 시 한 구절이 보인다. 그렇게 서정주 김수영 이시영 이성선의 시가 차례로 이어진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골목길에서 만나는 시와 그림은 김학량의 ‘그대에게 가는 길’이란 작업. 덕분에 정독도서관의 위압적인 축대를 따라 사색의 길목이 생겼다.

전통과 현대, 삶의 터전과 휴식공간이 혼재된 삼청동. 이곳에 둥지를 튼 커뮤니티디자인연구소와 디자인로커스가 기획한 서울시 공공미술프로젝트 ‘인사이드 아웃사이드’는 새로운 소통의 길을 꿈꾼다.

○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다

한 집 걸러 카페와 갤러리가 들어서고 주말이면 인파로 몸살을 앓는 시끌벅적한 상가처럼 변화하고 있는 공간. 아직도 7080세대 기억에 아련히 남아 있는 외진 뒷골목의 서정이 남은 마을. 삼청동의 두 얼굴이다. ‘인사이드 아웃사이드’는 고약한 돈의 논리에 휘둘리는 상업공간이 아니라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지는 정겨운 동네를 찾기 위한 프로젝트다. 정독도서관 앞에서부터 ‘적재적소’ ‘인왕제색’ ‘삼청동문’ ‘소로화랑’ ‘의사소통’ 등 다섯 프로젝트가 펼쳐진다.

먼저, 기존 시설을 정리하고 새 기능을 부여한 ‘적재적소’. 정독도서관의 간판과 도서수거함은 세련된 얼굴로 바뀌었다. 정문 앞에 버티고 있던 컨테이너를 치우고, 작은 갤러리 같은 관광센터와 초소가 들어섰다. 겸재 그림에서 제목을 빌린 ‘인왕제색’. 디자이너 이상환 씨는 삼청동에서 위풍당당한 인왕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대를 현대적으로 단장했다. 여기 서면 인왕산의 잘생긴 얼굴이 한눈에 보인다. 오른쪽에 병풍 같은 산자락이, 아래쪽에 이마를 맞댄 지붕들이 만드는 표정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삼청동문’은 동네를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서울맹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만지는 삼청동 지도’, 빈집의 담에 그려진 한성부 지도 등은 삼청동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초록빛 그림액자 같은 파출소 게시판과 ‘주민채소밭’이란 이름으로 골목을 장식한 반쪽짜리 대형 화분도 시선을 멈추게 한다.

○ 숨은 보물 찾기

‘인사이드 아웃사이드’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면서도 요란스러운 치장을 피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야기가 흐르는 길, 동네 사람들과 방문객이 겉돌지 않고 자연스레 소통하는 정도의 소박한 변화를 시도했다.

예컨대 김을의 골목길 문패 작업. 굽이굽이 휘어진 골목마다 ‘꽃내음길’ ‘우물길’ ‘바람길’ 등의 이름을 짓고 작가 손으로 만든 명찰을 달아 준 게 전부다. 김월식의 ‘안과 밖’은 내려갈 때는 안 보이고 올라갈 때만 보인다. 욕실 타일을 골목 계단의 수직면에 붙여 실내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1930년대 쌓은 석축의 무늬를 살린, 같은 작가의 ‘북두팔성’도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한마디로 숨은그림찾기 같은 성격의 프로젝트다. 그래서 주민의 반감을 살 정도로 카메라를 든 방문객들이 동네를 휘젓고 다닐 일은 없겠다. 공공미술이 지역의 맥락에 스며들려는 노력이다. 정이 넘치고 시가 흐르는 마을은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찾는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므로….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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