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깔보던 그들도 ‘양반’의 기품엔 경외감

  • 입력 2009년 2월 19일 02시 58분


1900년대 서울의 일본인 집단 거류지였던 충무로 주택가. 일본인들은 충무로 명동 이태원 등을 중심으로 집단 거류지와 상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00년대 서울의 일본인 집단 거류지였던 충무로 주택가. 일본인들은 충무로 명동 이태원 등을 중심으로 집단 거류지와 상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권숙인 교수 ‘식민지의 일본인’ 분석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 군(君)에게 기념 사인을 남기라고 수첩을 내밀자 ‘Orae et laborae(기도하라, 그리고 나서 움직여라)’라고 썼다. 라틴어다. 아무 생각 없이 난리를 치고 있는 우리와는 성숙도가 다르다. 조선인 중 좋은 가정은 일본인은 범접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살았던 한 일본인이 패전 뒤 쓴 회고록에서 같은 중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학생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또 다른 일본인의 회고록에도 조선인을 높게 평가한 대목이 눈에 띈다.

“어머니는 김 씨네 집 아이들은 행동이 반듯하니 보고 잘 배우라고 하셨다. 그 집에서는 남자아이건 여자아이건 양친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반듯하게 앉아서 조선어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권숙인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이 회고록을 통해 일본인의 일상을 미시적으로 분석한 논문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에서 “양반은 대개 ‘부자이고, 기품이 있고, 지적 수준이 탁월한’ 것으로 묘사됐는데 양반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서 ‘경외심’이나 ‘압도당함’ 등의 느낌을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논문은 한국사회사학회의 계간 학술지 ‘사회와 역사’ 최근호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양반’과 ‘요보’의 두 축으로 구분해서 대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양반들은 ‘학업 실력이 발군’이거나 ‘당당한 품격’을 갖췄던 반면 조선의 서민들은 ‘요보’라는 지칭으로 보통 명사화(化)해버릴 정도로 하찮은 대상이었다.

권 교수는 “‘요보’는 ‘여보’나 ‘여보시오’의 일본식 발음으로, 원래는 상대를 부르는 호칭이지만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담아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한 일본인은 회고록에 “그들(일본인들)은 어떤 조선인에 대해서도 일률적으로 ‘요보’라고 부른다. 조선인에 대해 쓸 때는 반드시 그 성조에 일종의 경멸과 위협의 의미가 덧붙여진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조선인에 대한 멸시감은 아이들이 조선인에게 내뱉는 ‘요보인 주제에’란 말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그 말 뒤에는 ‘조선인인 주제에 감히 일본인에게 말대답을 하는가’ 등의 뜻이 내포돼 있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권 교수는 “일본인 가정에서 일하는 여성 가사노동자 가운데 기혼 여성을 ‘오마니’로, 미혼 여성을 ‘기지베’로 통칭하는 등 일본인들은 조선의 서민을 몰개성적인 대상으로 뭉뚱그려 인식했다”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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