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미에 숨 멎는 듯… 파격미에 정신 번쩍

  • 입력 2009년 1월 22일 02시 55분


‘황금빛 유혹’ 미리 만나는 클림트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에서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황금빛 액자 아래 금빛으로 찬연하게 빛나는 나무와 잎사귀들, 그 사이에서 눈부신 황금 목걸이를 한 여인이 살짝 벌린 입술과 몽롱한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한쪽 가슴만 하늘거리는 천으로 가린 채 벗은 몸을 드러낸 여인의 황금빛 매혹에 무심코 빠져드는 순간 문득 뺨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든다. 농염한 관능미를 발산하는 여인의 오른손엔 자신이 칼로 벤 남자의 머리가 들려 있다. 황홀한 기쁨의 표정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파멸이 공존하는 세계, 바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걸작 ‘유디트 Ⅰ’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미술관 2층 전시장에서 만난 이 작품은 성적 충동(에로스)과 죽음의 충동(타나토스)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클림트 특유의 장식적 기법으로 드러낸다. 적장과 동침한 뒤 그를 죽여 민족을 구한 구약성서의 유대 여성. 클림트의 붓을 통해 구국의 영웅에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팜 파탈로 다시 태어난 유디트가 한국에 온다.

‘유디트 Ⅰ’을 비롯한 클림트의 걸작들은 2월 2일부터 5월 15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클림트의 황금빛 비밀’전에서 만날 수 있다. 벨베데레 미술관을 비롯해 11개국 20여 개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들이 작품 대여에 참여해 클림트의 유화 30여 점, 드로잉과 포스터 원본 70여 점 등과 설치물을 선보이는 자리다.

극성팬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유치한 이 전시는 아시아 최초의 클림트 단독전이자 금세기의 마지막 대규모 클림트전이 될 것이란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세계에서 클림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벨베데레 미술관이 작품 보존상의 이유로 한국 전시를 끝으로 작품을 외국에 내보내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 클림트, 그 치명적 유혹

흰 눈에 덮인 바로크식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문 사이에 걸린 ‘유디트 Ⅰ’은 자연채광 아래서도 황홀한 빛을 발한다. 미술관이 만든 달력의 1월을 장식하고, 팸플릿에 유일하게 두 쪽에 걸쳐 소개된 이 그림은 ‘키스’와 함께 미술관이 가장 앞에 내세우는 클림트의 대표작. 그림 모델이 ‘아델레 블로흐바워의 초상’과 동일인물이란 것도 흥미롭다.

‘아델레…’는 2006년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 보유한 기록을 깨고 당시로선 회화 거래 사상 최고가인 1억3500만 달러, 그때 환율을 적용하면 약 1300억 원에 팔렸다. 클림트가 가장 비싼 화가로 오른 순간이었다.

그에게 영감의 원천은 여자였다. ‘유디트 Ⅰ’이 클림트가 추구한 황금빛 에로티시즘의 특징을 오롯이 담아낸 초기작이라면, ‘유디트 Ⅰ’과 함께 한국전에 오는 ‘아담과 이브’는 죽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말년의 대표작이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자신감 넘치는 이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홍조 띤 뺨의 이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혹의 시선을 던진다. 그 뒤의 아담은 불안하고 무기력한 모습이다. 여성의 독립된 자아와 성적 욕구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여서 더 돋보였던 유디트와 이브. 클림트가 해방시킨 여자들의 당당한 매력은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한다.

○ 클림트, 그 평화로운 풍경

2000년대 들어 클림트는 뛰어난 풍경화가로 재평가받고 있다. 인간을 옥죄는 욕망과 본능을 파고든 에로티시즘의 화가로만 그를 한정짓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여름이면 빈 근교 아터 호수를 즐겨 찾았던 그는 자연의 재현이 아닌, 원근법을 무시하고 자기 감각으로 해석한 풍경화를 그렸다. 벨베데레 미술관의 미술사가 앙겔리카 카즐베르거 씨는 “클림트는 자신의 사유를 녹여낸 강렬한 그림과 달리 풍경화에선 이상향에 근접한 자연을 부드러운 느낌으로 녹여냈다”며 “천국 같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그의 풍경화는 이곳을 찾는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클림트의 전모를 보여주고자 기획된 이 전시에선 여성의 유혹적 포즈를 몇 개의 선으로 극명하게 부각시킨 천재적 드로잉, 회화 건축 공예 실내장식 등 다양한 장르가 통합된 토털아트(총체 예술)를 시도한 작업도 조명한다.

○ ‘클림트 바이러스’의 열기 속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는 화가 중 하나로 꼽히는 클림트. 삶과 사랑, 죽음 등을 소재로 생명의 순환을 파고든 그의 도전과 실험은 당대에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관습을 전복하고 금기를 깨뜨린 그의 작품은 21세기에도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술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온 세계 젊은이들의 문화와 삶 속에 깊숙이 뿌리내린 ‘클림트 바이러스’, 이제 한국이 그 열기에 빠져들 시간이다.

2월 2일∼5월 15일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관람료 성인 1만6000원, 청소년 8000원, 어린이 5000원. 02-334-4254

빈=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클림트(1862∼1918)

세기말에 대한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활동한 화가.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벽화 등을 주문받아 그리는 장식화가로 출발했으나 30대 중반부터 금박을 사용한 독창적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보수적이던 빈미술가협회를 뛰쳐나와 빈 분리파를 결성한 뒤 초대 회장을 맡았다. 평생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기며 독신으로 지냈다.

○벨베데레 미술관

‘벨베데레’는 ‘아름다운 전망(Beautiful View)’이란 뜻의 이탈리아 말.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미술관은 정원을 사이에 놓고 상궁과 하궁으로 나눠져 있으며 1923년부터 국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클림트 컬렉션으로 이름 높은 이곳은 클림트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순례코스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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