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3>

  • 입력 2009년 1월 21일 02시 56분


볼테르는 <격투로봇 개론> 첫 시간마다 묻는다.

“그대들은 한 호흡으로 보낸 시절이 있는가?”

볼테르에게는 글라슈트와 함께 한 지난 2년이 그랬다.

팀원들은 글라슈트 프로젝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차세대로봇연구센터(RINGE) 차석연구원 꺽다리 세렝게티는 선제공격을 고집했고, 수석연구원 뚱보 보르헤스는 나풀거리며 스텝을 밟다가 태클이라도 당하면 일격에 무너진다며 반대했다. 뉴욕 유학을 마치고 2048년 1월에 합류한 뇌신경과학자 노민선 역시 속전속결을 주장했다. 그러나 볼테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노란 버튼 셋을 차례로 눌렀다. 대기실 철문이 열렸고, 동시에 등장한 로봇 석 대가 글라슈트를 에워쌌다. 전갈처럼 많은 발을 가진 미리아포다봇(Myriapodabot)과 박쥐처럼 허공에 뜬 채 쉬이익쉭 기분 나쁜 소음을 뱉는 로보뱃(Robobat)과 호랑이처럼 네 발을 딛고서 고개를 치켜든 타이거봇(Tigerbot)이었다.

스파링이 시작되었다.

글라슈트가 스텝을 밟으면서 양팔을 번갈아 위아래로 휘저었다. 택견의 품밟기와 활갯짓을 응용한 ‘글라슈트 댄스’였다.

타이거봇이 등을 보이면서 백스핀블로를 날리자 글라슈트가 덤블링으로 물러섰다. 미리아포다봇이 전진하며 무릎과 발목을 향해 쉴 새 없이 로킥을 내질렀다. 옆구르기로 로킥을 피한 글라슈트가 껑충 뛰며 플라잉니킥으로 타이거봇의 턱을 쳐올렸다. 글라슈트의 발이 바닥에 닫자마자, 로보뱃이 등 뒤에서 허리를 잡고 넘기는 스플렉스를 시도했다. 미리아포다봇이 테이크다운을 당한 글라슈트의 상체에 도장을 찍듯 스탬핑을 퍼부었다. 재빨리 배를 깔고 앉으면서 마운트 포지션을 차지한 타이거봇이 주먹을 휘둘러 파운딩을 날리고 빠지자, 로보뱃이 목을 당겨 꺾는 넥 크랭크를 시도했다.

넷, 셋, 둘, 하나!

볼테르의 시선이 중지 버튼 쪽으로 향했다. 더 스파링을 진행시켰다가는 글라슈트의 목이 부러질 것이다.

“잠시만요!”

사라가 뒤에서 볼테르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글라슈트를 믿어요. …글라슈트를 믿어야죠. …글라슈트를 믿고 싶어요. …글라슈트뿐인걸요.”

그때마다 볼테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격투로봇일 뿐이야! 설정된 한계를 넘는다면 그건 로봇이 아니지. 아무리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라도 승부욕을 불태우며 한계를 극복할 순 없어. 중지시켜야 해.

볼테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라가 짧게 외쳤다.

“시작해, 글라슈트!”

글라슈트가 왼팔로 로보뱃의 가슴을 밀면서 틈을 벌린 후 어깨를 밀어 넣었다. 다시 오른팔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자 목에 대한 압박이 풀렸다. 로보뱃의 가슴에 이마를 붙인 후 빙글 몸을 돌려 사이드마운트 포지션을 빼앗은 다음 무릎을 펴며 일어섰다.

세 로봇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글라슈트는 품을 밟지 않고 멈춰 서서 그들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왼팔로 타이거봇의 목을 끌어안고 오른팔로 로보뱃의 허리를 두른 후 미리아포다봇을 두 발 사이에 끼웠다. 글라슈트의 탁월한 균형감각과 튼튼한 하체가 세 로봇의 무게를 감당했다.

글라슈트가 숨을 고르듯 고개를 약간 숙이며 발끝을 살폈다. 지름 2센티미터의 구멍이 잘록한 허리를 삥 둘러 촘촘하게 뚫렸다. 둥근 빨판이 오징어 다리처럼 뻗어 나와 세 로봇에 들러붙었다. 로봇들이 빨판을 걷어내려고 몸부림칠수록 빨판에 오돌토돌 돋아난 작은 송곳들이 외장을 찢고 더 깊이 박혔다.

글라슈트가 빙글빙글 맴을 돌기 시작했다. 타이거봇과 로봇뱃과 미리아포다봇이 원심력 때문에 따라 돌았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시속 100킬로미터, 200킬로미터를 지나서 400킬로미터에 이르자 굉음이 훈련장을 흔들며 울렸다. 로봇들의 몸체가 사정없이 바닥에 부딪혔다. 수십 개의 관절모터가 나가떨어졌다.

이윽고 글라슈트가 회전을 멈추었다. 바닥에 나뒹군 세 로봇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15초나 견뎠네요. 대성공이죠?”

사라가 사뿐사뿐 글라슈트에게 나아갔다. 볼테르는 깍지 낀 양손을 뒷목에 댄 채 허리를 폈다.

“다음엔 이런 장난 하지 마. 넥 크랭크를 풀지 못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글라슈트를 믿었어요.”

망할 믿음 같으니라고!

● 알립니다 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은 지면 게재일 전날 오후 2시부터 동아일보 홈페이지(www.dongA.com)에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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