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불황에 ‘책파라치’ 극성

  • 입력 2009년 1월 15일 15시 19분


4살 아이를 둔 주부 조현경(가명)씨는 지난해 10월 한국슈타이너사의 아동용 도서 전집을 되팔려고 중고유아용품을 사고파는 사이트에 올렸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조 씨가 매물을 등록하자마자 누군가가 책을 구입하고 싶다고 연락해왔고 조 씨가 책을 구입한 가격, 구입한 서점까지 꼬치꼬치 캐물은 뒤 책을 사 갔다. 며칠 후 조 씨가 전집을 구입했던 서점에 출판사가 '도서 정가제 위반'으로 위약금을 물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알고 보니 조 씨의 책을 사간 사람은 '책파라치'(도서정가제를 지키지 않는 서점을 출판사에 신고하고 수당을 받는 모니터링 요원)였던 것. 조 씨는 "책파라치에게 전화로 항의하자 일이 커질 수 있다는 등 오히려 협박의 말만 들었다"며 "자주 이용하던 서점 주인이 나 때문에 피해를 보아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 출판, 서점가 불황에 '책파라치' 극성

'책파라치'는 출판사에서 직접 고용하기도 하고 신고건수에 따라 수당을 받기도 한다. 대부분 주부들인 이들은 중고책 거래 사이트에 유아용 도서 전집을 매물로 내놓은 주부들에게 접촉, 구입처와 구입가격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책을 정가보다 싸게 파는 서점들을 찾아낸다.

최근 '책파라치'들이 더욱 극성인 이유는 극심한 불황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3개월 동안 '책파라치'로 활동한 적이 있는 주부 김수경(가명) 씨는 "7살 난 아이에게 책도 좀 더 저렴하게 사 줄 수도 있고 교육비도 벌 수 있어 '책파라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출판사는 도서 정가제 준수로 책값을 유지하려고 하고, 서점은 값을 내려서라도 책을 팔고자 한다. 주부들 역시 중고책 거래 사이트를 통해 아이들 책값을 아껴 보려고 하거나 아니면 '책파라치'로 활동하면서 아이 책값이라도 벌려 한다. 결국 팔고 사고, 신고하고, 신고당하는 측이 모두 현재의 경기 불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

● 출판사가 도서정가제 위반을 단속한다?

'도서 정가제'란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라 출간 된지 18개월 미만 신간 서적들을 10% 이상 할인판매 하지 못 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도서 정가제 위반 과태료는 해당 지자체에서만 부과할 수 있다. 그러나 '책파라치'의 신고를 받은 출판사들이 자체적으로 서점에 위약금을 매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서점을 운영하는 이주연(가명) 씨는 '책파라치'의 신고로 출판사에 위약금을 물었다. 출판사가 이 씨에게 위약금을 요구할 수 있었던 근거는 출판사와 서점이 전집 판매 계약을 맺을 당시 정가보다 10% 이상 싸게 팔지 않겠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씨가 이를 어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씨는 "주부들이 한 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 책을 구매하는데 도리가 없었다"면서 "온갖 할인 이벤트로 독자를 유인하는 온라인 서점과 경쟁하기 어려운 우리로서는 이윤을 덜 남기고라도 책을 팔아야만 하는 형편"이라고 호소했다.

현재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은 발행일 기준으로 18개월 이내 신간을 도서 정가제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출판사들은 자의적으로 발행일 기준이 아니라 1쇄, 2쇄가 나올 때마다 18개월 기준을 적용해 도서 정가제 대상이라며 위약금 지급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유아 전집을 중고 사이트에 매물로 내놓는 소비자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두고 AS나 리콜을 거부하는 출판사들도 있다.

한편 이 같은 지적에 대해 한국슈타이너 측은 "도서 정가제가 무너지면 전집류 시장도 붕괴한다는 위기감이 있다"며 "소비자를 불편하게 하는 내부 규정을 개정, 앞으로는 AS나 리콜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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