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겁없는 괴물작가, 모성연기 헤로인 만나 일냈죠”

  • 입력 2009년 1월 8일 02시 58분


대학로 게릴라극장에 새로 붙은 ‘원전유서’ 공연 포스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왼쪽)와 김지훈 작가. 김경제 기자
대학로 게릴라극장에 새로 붙은 ‘원전유서’ 공연 포스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왼쪽)와 김지훈 작가. 김경제 기자
사진제공연희단거리패
사진제공연희단거리패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원전유서(原典遺書)’가 한국 연극이 100주년을 맞았던 2008년 최고의 창작극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제45회 동아연극상에서 대상 연출상 여자연기상 극본상 무대미술·기술상 등 5개 부문을 차지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뽑은 2008년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뽑혔고, 제1회 대한민국연극대상에선 극본상과 여자연기상도 수상했다. 생애 두 번째 희곡으로 연극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김지훈(30·고려대 문예창작과 4년) 작가와 이 작품의 헤로인으로 연기상을 휩쓴 김소희(39) 연희단거리패 대표를 5일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만났다.》

동아연극상 5관왕 ‘원전유서(原典遺書)’ 작가 김지훈-배우 김소희 씨 인터뷰

쭉 찢어진 눈초리와 단호한 입매, 큰 두상에 바가지 형태로 머리를 길게 기른 김 작가는 원전유서의 연출가인 이윤택 씨를 빼닮았다.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은 그를 ‘리틀 이윤택’으로 부른다.

“외모만 닮은 게 아니죠. 두 사람 모두 일상적 담론보다는 거대 담론을 좋아하고 리얼리즘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신화적 이야기를 좋아하죠. 이 선생님이 사람들과 어울려 담론을 펼치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김 작가는 혼자서 골똘히 침잠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정도가 다를까.”(김 대표)

울산지역 공고 출신의 김 작가는 뒤늦게 문학창작의 길로 뛰어들어 200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2006년 생애 첫 희곡으로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은 뒤 연출가 이 씨가 이끄는 ‘우리극연구소’에서 연기공부를 하며 원전유서를 완성했다. 고졸 학력의 부산지역 문학도에서 출발해 엄청난 자생력으로 연극, 방송, 영화, 출판 등 전방위 문화활동으로 ‘문화 게릴라’라는 명성을 얻은 이 씨의 인생행로와 닮았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요즘 문학계와 달리 연극판에선 타인과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연극계가 원전유서처럼 무겁고 길고 관념적 작품을 진지하게 받아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소통의 힘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 작가)

그는 “배우들이 서점엔 가지 않고 성형외과로 가고, 내 또래의 작가들이 자신만의 정자를 짓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내고 있다”며 거침없는 비판을 가했다. 그 역시 안정된 삶에 안주할까 봐 대학졸업장도 포기했다. 이 시대의 실업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을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다.

그의 모습에서 프로야구계 ‘괴물’로 불리는 투수 류현진이 겹쳐진다.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포커페이스에 내로라하는 베테랑들도 질겁하게 하는 강속구를 뿜어내는 겁 없는 신인이다.

반면에 서글서글한 이목구비를 지닌 김 대표는 그 ‘괴물’을 강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보살피는 어머니 같았다.

국내 연극 작품 중 최장 상연시간(4시간 반) 기록을 세운 원전유서는 관념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흡이 긴 대사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의 어진네 역으로 여자연기상을 휩쓴 그에겐 대사가 거의 없다. 쓰레기하치장이란 불모지대를 밭으로 일구며 자신과 어린 두 자식에게 쏟아지는 무자비한 폭언과 폭력을 신음과 침묵으로 감내하는 어머니 역이다.

“원래 부당한 것은 절대 못 참는 성격이라 어진네가 가슴으로 이해가 안 돼 맘고생이 심했어요. 원래 혼자선 연습 안 하는데 무대에 오르기 보름 전쯤 골방에서 제가 평소에 짓지 않는 멍하고 어눌한 표정을 ‘폰카’로 찍어 놓고 거울을 보며 연습을 했어요. 그렇게 몰입하다 보니 표정뿐 아니라 정말 말까지 어눌해지더라고요.”

김 작가는 그렇게 변해가는 김 대표를 보면서 남몰래 ‘어진네’의 모델로 삼은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이 느껴져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미혼인 김 대표가 그 같은 모성애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2005년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뒤 3년 만에 연기상을 거머쥔 그의 독특한 이력과 겹쳐졌다.

“1998년 서울연극제에서 신인상을 받은 제가 2005년 신인상을 받는 게 맞느냐고 후배들이 놀린다는 얘기를 꺼냈다가 유인촌 선배님에게 ‘연극판에선 넌 아직 신인에 불과하다’고 혼난 적 있어요. 그 뒤 신인상이 유인촌신인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동아연극상에서 2년간 4명의 여배우만 받은 희귀 상을 받은 셈이 됐어요.”

어린 누이 같으면서 동시에 늙은 어미처럼 다가서는 배우 김소희의 매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원전유서는 쓰레기 매립지 빈민촌 무대… 인간의 조건-구원 다뤄

쓰레기 매립지 빈민촌을 무대로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과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담아낸 작품이다. 빈민운동가 남전과 폭력적인 남편에게 재가한 어진네, 그녀의 초등학생 아들 어동이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남전은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구원의 빛은 폭력에 무방비로 희생되는 것처럼 보이는 어진네의 깊은 모성애와 어동이의 순수한 동심에서 발견된다. 제목의 원전은 인간보편의 원형을 뜻하고, 유서는 그 보편의 기록이 결국 원초적인 순수함으로 귀결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올해 가을 재공연에 들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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