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8년 루스벨트 자선재단 설립

  • 입력 2009년 1월 3일 02시 57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어떤 동전에 그의 얼굴을 새겨 오래도록 기억할 것인지는 고민거리가 되지 못했다. 당연히 다임(10센트)이었으니까.

그 이유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선린외교정책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칭에서 찾을 수 있다. 소아마비 퇴치를 위한 자선재단 ‘마치 오브 다임스(March of Dimes)’.

루스벨트가 이 재단을 설립한 날이 1938년 1월 3일이다. 그가 세운 가장 큰 공헌은 기금 마련보다는 두려운 질병을 극복해나간 인간으로서 하나의 상징이 됐다는 점이다.

명문가 아들로 태어나 변호사,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던 루스벨트는 39세 때 여름휴가지에서 소아마비에 걸렸다. 하반신이 마비되는 바람에 평생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절망에 빠진 루스벨트는 아내 엘리노어에게 물었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나를 사랑하오?” 엘리노어는 그를 바라보면서 답했다. “그동안 당신의 성한 다리만 사랑한 줄 알았나요. 내가 사랑한 건 당신 그 자체예요.”

루스벨트는 건강과 커리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스스로 ‘꽤 긴 인생의 바캉스’라 불렀던 이 기간이 지난 뒤 뉴욕 주지사를 지냈고 2년 뒤 재선에 성공했다. 1932년에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서 압승을 거뒀다.

고통의 시간을 경험한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장애인에게 꾸준히 관심을 가졌고 ‘마치 오브 다임스’ 설립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라고 했다. 소아마비가 남긴 후유증은 그에게 한계가 아니었다.

‘마치 오브 다임스’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과 환자의 재활을 돕기 위한 기금 모금을 목적으로 했다. 초기엔 부유한 유명인사들에게 주로 의존했으나 대공황 시기에 소아마비가 급속히 퍼지면서 범위를 넓혔다. “전 국민이 백악관으로 10센트씩 보내자”는 가수 에디 캔터의 제안에 268만 다임과 수천 달러가 모였다.

1955년 ‘마치 오브 다임스’는 미시간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계를 향해 공표했다. 이 단체의 지원을 통해 조너스 소크 박사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것이다. 이제 소아마비는 찾아보기가 거의 힘들어졌다. 임무를 완수한 ‘마치 오브 다임스’는 선천성 기형, 조산, 1세 미만 유아 사망 예방 쪽으로 초점을 옮겨 활동한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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