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인도의 ‘슬픈 자화상’…‘상실의 상속’

  • 입력 2008년 10월 25일 03시 01분


◇상실의 상속/키란 데사이 지음·김석희 옮김/584쪽·1만5000원·이레

“데라둔에서 온 바스마티(향미가 풍부한 인도 쌀) 자루 속에 죽은 벌레의 여행은 그 자신의 여행을 생각나게 했다. 인도에는 바스마티를 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 외국에서는 부자가 아니더라도 그 쌀을 실컷 먹을 수 있을 만큼 값이 쌌다. 그런데 그 쌀이 재배되는 고국으로 돌아가면 너무 비싸서 더 이상 쌀을 살 수가 없었다.”

히말라야 칸첸중가가 멀리 보이는 인도 서벵골 주 북부의 도시 칼림퐁. 이제는 낡아버린 저택 ‘초오유’에는 가족 넷이 살고 있다. 은퇴한 판사 출신 제무바이와 애견 무트, 인도가 ‘최고의 나라’ 미국보다 먼저 아침이 온다는 걸 이해할 수 없는 요리사, 그리고 외할아버지 손에 맡겨진 소녀 사이가 전부였다. 그리고 요리사에게는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있었다.

○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인생

그들은 동족이며 가족이었으되 또 그만큼 달랐다. 힌두어밖에 모르는 요리사와 영어만 쓰는 사이의 거리만큼 멀었다. 영국 유학에서 맛본 지독한 열등감으로 인도인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제무바이, 자신은 계급사회를 체념하고 받아들이면서 아들은 그러지 않길 바라는 요리사, 꿈 많은 10대 소녀지만 사고로 부모를 잃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이…. 그들의 또 하나 공통점은 각자 가슴에 뻥 뚫린 ‘상실’을 안고 산다는 것뿐. 그리고 그 상실은 인도라는 땅에 태어난 이상 짊어져야 하는 유산과도 같았다.

요리사의 희망인 아들 비주 역시 마찬가지. 그린카드(영주권)도 없이 싸구려 일자리를 전전하는 그에게 아버지의 기대는 벗어던지고픈 짐이었다. 레스토랑 허드렛일을 하는 똑같은 처지의 파키스탄 동료와 결코 잘 지낼 수 없는 업보처럼. 상실은 그 땅을 떠나서도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었다.

○ 세계 3대 문학상인 英맨부커상 수상작

인도 출신 여성 작가인 저자의 2006년 작인 ‘상실의 상속’은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리는 영국의 맨부커상 제38회 수상작. 2001년 국내에 소개된 장편소설 ‘구아바’에서 종교적 열정에 휩싸인 인도의 한 마을을 통해 가족 관계의 본질 및 인간의 허영을 재치 있게 꼬집었던 작가는 또 한 번 ‘인도의 현대’라는 환부에 메스를 댄다.

작가가 보기에 인도 하면 떠오르는 ‘안식의 땅’ ‘성자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현실 왜곡이다. 소설 속 그들은 오랜 정신문명을 상속받아 서양 앞에 당당한 영혼의 파수꾼들이 아니다. 오히려 영국의 지배와 오랜 가난에 움츠러들고 약해진 이들이다. 전통 문화는 물론 서구적 기준이 통용되던 식민지 문화마저 잃어버린 인도. 그 속에 남은 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관념에 빠지거나 고향을 등진 채 국제 시장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슬픈 후예의 한숨뿐이었다.

‘상실의 상속’은 슬프다. 제국주의에 희생당했던 인도의 이력과 현재까지 드리워진 그림자는 한반도와 엇비슷한 이력 탓인지 울림이 크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바로 이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우연이 아니며, 그것은 내가 물려받은 상속재산”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물려받았는가. 원제 ‘The Inheritance of Loss’.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