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제국’에 유배된 당신에게…

  • 입력 2008년 1월 28일 20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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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윌리엄 클라인의 ‘클럽 알레그로 포르티시모’. 마치 패션모델처럼 멋진 포즈에 강렬한 시선을 내뿜는 ‘헤비급’ 여성들의 표정은 몸매와 상관없이 당당하고 아름답다. 이 작품을 포함한 클라인의 사진전은 2월 17일까지 갤러리 뤼미에르에서 열린다. 사진 제공 갤러리 뤼미에르 ⓒKLEIN, William
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윌리엄 클라인의 ‘클럽 알레그로 포르티시모’. 마치 패션모델처럼 멋진 포즈에 강렬한 시선을 내뿜는 ‘헤비급’ 여성들의 표정은 몸매와 상관없이 당당하고 아름답다. 이 작품을 포함한 클라인의 사진전은 2월 17일까지 갤러리 뤼미에르에서 열린다. 사진 제공 갤러리 뤼미에르 ⓒKLEIN, William
최근 노화랑에서 열린 유망작가 사진전에 선보인 데비 한의 ‘A ShyGrace’. 비너스의 두상에 평범한 한국 여인의 몸을 결합시킨 합성사진이다. 사진 제공 노화랑
최근 노화랑에서 열린 유망작가 사진전에 선보인 데비 한의 ‘A ShyGrace’. 비너스의 두상에 평범한 한국 여인의 몸을 결합시킨 합성사진이다. 사진 제공 노화랑
세 자매 중 맏딸은 똑똑하고 예쁜데다 착하기까지 하다. 근데 세상 참 불공평하다. 동생 둘은 딴판이다. 특출난 것이라곤, 또래 남자들에 주눅 들지 않을 '범상치 않은 중량' 뿐. 못생긴 건 용서해도 뚱뚱한 건 용서할 수 없다는 요즘 세태에 비춰보면 엄청난 불운을 타고난 셈이다. 게다가 언니만 편애하는 아버지. 둘은 심술을 참을 수가 없다!

한참 방영중인 TV 인기 드라마의 설정이다. 한국 드라마가 으레 그렇듯, 재능 미모 인성까지 갖춘 맏이가 주인공. 하지만 내겐 여동생들의 캐릭터가 더욱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드라마에선 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몸에 대한 문화적 억압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근대가 끝날 때까지 육체는 정신의 하위개념으로 밀려났으나 현대에 와서 상황이 역전됐다. '욕망하는 기계'라는 몸이 정신을 속박하는 시대. 전 세계에 표준화된 미의 기준이 자리 잡게 됐다. 더불어 몸에 대한 말걸기는 현대 예술의 주요 테마로 자연스레 떠올랐다.

뽀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목욕탕. 그 안에 수영복으로는 감춰지지 않는 출렁거리는 살을 당당하게 드러낸 슈퍼 헤비급 여인들이 있다. 우람한 팔뚝과 허벅지를 과시하면서 모델처럼 저마다의 포즈를 취한 그들. 몸의 구속을 받지 않아서인지 시선은 한결같이 강렬하다. 세상을 향해 양해와 동정을 구하기보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릴 듯한 도전적 표정.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위엄마저 감돈다.

현대 사진의 거장인 윌리엄 클라인의 '클럽 알레그로 포르티시모'(75x100cm 1990). 갤러리 뤼미에르에 걸린 이 사진은 '살=추한 것'이라는 편협한 인식을 뒤집으며 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유쾌하게 일깨운다. '사진은 삶을 보여주는 열린 창문'이라고 말한 클라인은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뚱뚱하면 섹시할 수 없다고?'라고 되묻는 듯하다. 여인들의 당당한 시선, 여기서부터 뿜어 나오는 자신감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그 무엇임을 보여준다.

사진을 보면서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이 떠올랐다. 비만이 아름다움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보테로. 그는 모나리자든 발레리나든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을 실제보다 뚱뚱하게 변형시킨다. 겉치레만 신경 쓰는 현대인들의 허상을 꼬집는 듯한 그의 작품은 보기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최근 노화랑에서 열린 유망작가 초대전에 선보인 젊은 여성 아티스트 데비 한의 'A Shy Grace'도 아름다움에 대한 열린 해석을 유도한다. 재미교포 1.5세인 작가는 '일상의 비너스'시리즈 등에서 평범한 한국 여성의 몸에 서구 고전미의 상징인 비너스의 두상을 덧붙이는 합성사진 작업을 선보여 왔다. 서구적 미의 척도가 지배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들. 그 속에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경계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S라인, 혹은 왕(王)자로 상징되는 복근 등 보편적 미의 기준을 강요하는 현대 소비사회. 완벽한 몸에 대한 강박은 마치 이데올로기처럼 커져만 간다. 그러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는 용기와 변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정'은 몸에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기쁨의 샘이면서/절망의 주머니다/…/하루 아침에 일어나고/하루 아침에 쓰러진다/먼지 하나에 울지만/풀잎 하나에 웃는다'(정현종의 '몸뚱아리 하나'에서)는 몸. 불가능한 목표 때문에 제 몸을 할퀴고 파괴하는데 그 영혼이 온전할 리 있을까.

원치 않는 군살의 무게는, 곧 그만큼의 무거운 슬픔이 되는 세상이다. 그래도 남들 잣대에 휘둘려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다짐. 그게 바로 몸과의 불화를 이겨내는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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