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 “귀에 청산가리 넣었다”

  • 입력 2008년 1월 3일 17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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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고은 시인. 동아일보 자료 사진
등단 반 세기를 맞이한 고은(75) 시인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가 운영하는 '문장 웹진'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삶과 문학에 대해 털어놓았다.

고은 시인은 '문장 웹진' 1월호의 신년특집 '작가와 작가'에서 후배 시인 김형수(49)와 대담을 갖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비롯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소회, 앞으로의 계획 등을 밝혔다.

그는 "1958년 국내 시단에 처녀작을 선보이고 시인이 된 뒤 50년의 세월을 보냈다"면서 "이 50년은 근대시 100년의 절반이니 절반 이전의 선배들의 시세계를 등에 진 채 나머지 절반을 살아온 셈"이라고 말했다.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고은 시인은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 이래 시와 수필, 평론을 넘나들며 100여권의 저서를 내놓았다.

고 시인은 "내가 등단했을 때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도시도 산도 폐허가 되고, 인간의 마음 자체도 폐허였던 시절이다. 그런 데서 어떻게 나 같은 게 살아 남아서 숨을 쉰 것"이라면서 "그 폐허에서의 호흡, 이게 내 시의 출발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과거가 없는 일종의 '고아' 시인"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 집을 그린 게 아니라 기차나 돛단배, 철새를 그렸다"면서 "유목민적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그네의 운명이 내 시에 그려져 있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첫 시집으로 내놓으려 했던 모더니즘 풍의 '불나비'가 인쇄소 화재로 소실되는 바람에 '피안감성'이 졸지에 첫 시집이 돼버린 비화도 공개했다.

상대와 이야기할 때 늘 귀를 쫑긋 세우는 시인은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사연도 털어놓았다.

그는 "전후 세대로 살아남았을 때 이 세상 소리가 다 듣기 싫어 귀에 청산가리를 집어넣었다"면서 "그 때문에 한쪽 고막이 녹아내렸고, 나머지 한쪽은 1979년 미국 카터 대통령 방한 당시 반대 데모를 하다 잡혀가 구타당해 파열됐다"고 밝혔다.

양쪽 고막을 모두 잃은 그는 이후 자신의 피부로 한쪽 귀에 인조 고막을 만들어 넣어 겨우 겨우 청력을 지탱하고 있다.

우리 시단의 두 그루의 '큰 나무' 서정주와 김수영이라는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선배로부터 동시에 사랑받은 후배로는 유일한 것 같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시는 문법이니 규율이니 시스템이니 이런 것을 전부 다 불태워 버리는 행위"라면서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야만성, 자기가 위선적이면서 위선을 가장 (치열하게) 부정하는 모순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한 "서정주는 언어를 일부러 각고해서 가져오지 않지만 (손이)'탁'하고 가야금 줄에 닿으면 화음이 나오는 것과 같은 무서운 재능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그들에게 예속되고 싶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고 시인은 현재 우리 문단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는 "우리 문학에 비극 정신의 지속적 결핍은 여전히 지적돼야 마땅하다"면서 "시인에게는 불운이 있어야 한다. 비극정신이야말로 시의 고향"이라고 강조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시를 시로서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를 문학에서 독립시키는 것이 후기 생애에서 내가 할 일이죠. 시가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니라 문학에서 떨어져 나와서 오히려 철학과 가깝고, 세상의 울음과 가깝고, 세상의 꿈과 가까운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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