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는 즐거움 크다한들 빚는 즐거움에 비할까

  • 입력 2007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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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 빚는 맛에 취한 사람들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의 한 가정집. 주말을 맞아 회사원 공장일(36) 씨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쌀을 찌고 있다.

공 씨의 취미는 집에서 술 만들기. 막걸리를 빚기 위해 쌀을 찌고 있는 중이다. 아내와 세 살 난 딸도 찜통 옆을 지키며 아빠를 돕고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길 30분 정도. 광목천에 덮인 쌀을 거실 바닥에 펼치니 더운 김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사라지면서 쌀은 금세 고두밥으로 변했다. 막걸리를 만들기 위한 1차 재료가 만들어진 셈이다.

공 씨는 2001년부터 술을 빚기 시작했다. 그의 집 거실은 아예 술 전시관 같다. 매실 모과 등으로 담근 각종 과실주 페트병만 100개에 이른다. 술을 잘 ‘모셔 놓기’ 위해 직접 ‘술장’도 짰다.

○ “퇴근 후 짬 낼 수만 있어도 충분”

집에서 술을 빚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물론 취미로 술을 만든다. 판매만 하지 않는다면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을 허용하도록 1995년 주세법이 바뀌면서부터다. 이들은 “집에서 정성스럽게 빚은 술을 가족 친지 친구들과 함께 마시는 묘미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

“술을 왜 빚느냐고요? 음식을 만들 때 느끼는 즐거움과 비슷해요. 만드는 과정에서 정성이 담기지 않으면 제 맛을 내지 못하는 것이 술이죠. 또 술을 만든 다음에 집에 보관하는 재미도 좋아요. 퇴근 후 짧은 시간 술을 빚으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려요.”

회사원 유상우(34) 씨는 술박물관에서 근무하다가 술을 빚게 됐다. 지금은 ‘전통주 만들기’ 웹 카페의 운영자로 활동할 정도로 술 만들기에 흠뻑 빠져 있다.

술 마시는 것보다 만드는 데 훨씬 큰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 술 만들기 동호인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술 담그기 경력 6년째인 회사원 신연수(34·강원 강릉시 견소동) 씨는 “술집에서 파는 술들은 맛이 전부 일률적인 데 반해 집에서 만들면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매번 맛이 다르다”면서 술 만들기 예찬론을 폈다.

○ 요즘은 과실주 만들기 좋은 철

술 만들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1년 정도 경력이면 파는 술보다 더 맛있게 빚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요즘은 술 만드는 법을 정리한 웹 사이트나 책이 많이 나와 있어서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

막걸리만 제대로 만들면 대부분의 전통주는 응용해서 만들 수 있다. 막걸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위에 맑게 떠있는 액체를 뜨면 이것이 청주(약주)가 된다. 밑에 가라앉은 밥풀을 체를 이용해 걸러내면 막걸리다. 막걸리를 증류하면 소주가 되고, 소주에 과실을 넣으면 과실주가 된다. 막걸리를 따뜻하게 해서 알코올을 없앤 후 식사 때 곁들이는 것도 좋다.

요즘엔 탱자 모과 귤 유자 석류 등을 재료로 만든 과실주가 제격이다.

과실주는 과실에 함유된 비타민, 무기질, 당분이 그대로 녹아 있어 맛도 좋고 영양도 좋다. 과일주는 과일 1kg에 소주 1.8L를 부어 잘 밀봉한 뒤 직사광선이 비치지 않는 서늘한 곳에 3개월 이상 보관하면 된다. 모과는 단단해서 6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제 맛이 난다.

○ 전용 플라스틱통-제조법 나와 있어 만들기 쉬워

술을 만들려면 준비물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신 씨는 “예전에 막걸리를 만들려면 항아리가 필요하고, 이를 소독하기 위해 짚을 사용하는 등 과정이 복잡했다”면서 “요즘은 술을 만드는 전용 플라스틱통(사진)이 나와 있어 간편하다”고 말했다. 술 만드는 조리법만 따라하면 되므로 퇴근 후 한두 시간 짬을 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집에서 막걸리를 만들어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는 옛날 밀주를 만들었을 때 이야기다. 당시 막걸리에 단맛과 신맛을 내기 위해 첨가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요즘 집에서 만든 술은 첨가물을 넣지 않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지 않다.

누룩과 찐쌀을 담는 통을 충분히 살균하지 않으면 제대로 술맛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젖병 살균제나 약국에서 판매하는 에틸알코올을 사용해 통을 소독한다. 또 술을 담그면 탄산가스가 발생하므로 완전히 밀봉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 집에서 막걸리 만들기

① 찜통에 광목천을 두르고 쌀 2kg을 30분∼1시간 찐 후 식혀 고두밥을 만든다.

② 누룩과 술을 담글 수 있는 통을 준비한다. 누룩은 대형 마트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살 수 있다.

③ 쌀 양의 10%인 200g의 누룩을 잘게 부순 다음 고두밥과 함께 항아리(발효통)에 넣고 쌀 양의 150%인 3L 정도의 물을 붓는다. 항아리 대신에 플라스틱통을 써도 된다.

④ 아파트 실내 온도 정도인 25도에서 발효시키면 술이 만들어진다.

⑤ 가정에서 5∼7일 발효시키면 막걸리가 만들어지고 2, 3주 침전시킨 후 윗부분만 뜨면 청주가 된다.

⑥ 약간 단맛을 원하면 쌀 대신 찹쌀을 이용해도 좋다. 집에서 만든 막걸리의 알코올 도수는 16도 정도다.

■ 전통 가양주 지금은

송엽酒, 권씨네 과하酒…전국 96종 명맥 유지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집에서 김치를 담그는 것처럼 술도 빚어 마셨다. 1909년 일제가 주세령을 공포하면서 집에서 술을 담가 마시는 것을 법으로 금하게 됐다.

가양주(家釀酒)란 집에서 빚어 마시는 술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지역별로 가양주가 잘 발달됐다.

문화관광부의 지원으로 충남 서천문화원이 2005년 전국에서 생산되는 전통 가양주를 처음 조사한 결과 96종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따르면 전라도 가양주가 26개로 가장 많고, 경상도 24개, 충청 18개, 강원 13개, 경기 9개, 제주 6개가 뒤를 이었다. 집단으로 술을 빚어 유명한 지역은 한산 소곡주로 유명한 충남 서천, 법성포 토종주로 알려진 전남 영광, 진도 홍주로 유명한 전남 진도, 부산산성 누룩마을 등 4곳으로 조사됐다.

전문가들은 전라도 가양주가 유명한 것은 곡창지대라는 지역적 특성과 물이 깨끗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멥쌀 누룩 솔잎 소주 등으로 만든 권씨네 과하주, 고구마로 빚은 무안의 고구마술 등은 전라도 토종주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경상도는 유교 전통이 강해서인지 문중을 중심으로 명성을 얻었던 술이 많다. 밀양 손씨와 박씨 문중이 만든 밀양 방문주가 유명하다.

쌀이 귀한 지역에서는 ‘대체 곡물’로 만든 가양주가 발달했다.

제주는 쌀 대신 좁쌀을 사용한다. 제주를 대표하는 술인 고영자 오메기술은 좁쌀에 누룩, 들깨, 오가피를 넣어 만들었다. 강원도는 옥수수를 많이 사용한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국내 전통 가양주 현황 자료: 문화관광부
서울·경기 송포토속주, 송엽주, 잎새곡주, 산수유화주, 주교주, 평택농주, 못골 쑥술, 담소주, 둥굴레 약주 등 9개
충청 구기자주, 백엽주, 오겹술, 짚가리술, 대전 국화주, 채씨댁 청주, 현씨댁 청주, 소주 내린 침출주, 당진 송순주, 삽교 국화주, 생극 인삼동동주, 섯밭 동동주, 소사리 청주, 솥뚜껑 소주, 신태분 약주, 안순영 동동주, 이임순 인삼동동주, 노산춘 등 18개
경상 진사가루술, 고령 스무주, 밀양 방문주, 송정 두광주, 안동 이화주, 양동 송국주, 오갈주, 옥삼주, 유천 소주, 황죽매실주, 화실 솔잎술, 계팔리 스무주, 구미 감자술, 꿀밤술, 당골 백일주, 무술주, 도방주, 밀양 편주, 상주 백일주, 선산 약주, 선산 이화주, 선화주, 안동 송화주, 풍기 보리소주 등 24개
전라 두륜주, 권씨네 과하주, 솔죽주, 필암곡주, 부안팔선주, 남원 삼해주, 김제 백화주, 약주 이강주, 순창 진장주, 권씨네 점주, 양진순 점주, 순천 진양주, 보성 강하주, 솔순주, 권오표 과하주, 천마 국화 통합주, 안국사 청주, 순천 유자주, 완주 구절초주, 고흥백일주, 외서 백일주, 곡성 호박주, 고구마술, 용추 소주, 인동 막걸리, 전주 모주 등 26개
강원 송죽두견주, 단오신주, 삼척 호박술, 황골 엿술, 춘천 메밀술, 옥수수 황기 막걸리, 초피주, 옥수수 엿술, 춘천 의암 제주, 삼척 불술, 무릉리 신선주, 언별리 청주, 손곡 향미주 등 13개
제주 오합주, 고영자 오메기술, 전두규 오메기술, 김지순 오메기술, 강술, 표선 좁쌀 약주 등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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