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립 극장들, 예술은 멀고 돈은 가깝다

  • 입력 2007년 11월 14일 22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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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연 양성을 지원해야 하는 주요 국공립극장들이 재정자립도 때문에 대관료를 올리고 있어 다른 극장들도 대관료를 동반 상승시키고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 예술이 살아남기 어렵다." (박명성 서울연극협회장)

"정부가 국공립 극장의 재정자립도와 대관료 문제를 검토해보겠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9일 서울 정동 세실극장에서는 권오규 경제부총리와 공연예술계 관계자들의 간담회가 열렸다. 송승환 PMC 프로덕션 대표, 박인배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장, 김지숙 극단 전설 대표, 하상길 세실극장 대표 등 공연계 인사들은 주요 국공립 극장들이 수익성 위주로 운영하기 때문에 작품 창작 활동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성토했다.

국립극장, 서울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등 국내 대표적 국공립 극장들이 재정자립도를 위해 기획공연 보다는 수익성 위주의 대관 사업에 치중해 공연계의 질타를 받고 있다. 공공예산으로 배정된 기획공연 예산도 다 쓰지 않고, 대관료는 잇달아 인상하고 있다.

○공연 기획 예산은 수십억, 공연 기획은 어디로?

올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공연은 100여 편. 산하단체들의 정기공연을 제외하고 세종문화회관이 자체 기획한 공연은 '1000원의 행복', 어린이 클래식 음악회 '피터와 늑대' 등 5편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시카고' 등 흥행 뮤지컬이나 '번 더 플로어' 같은 쇼 등 대관공연으로 대부분 채워졌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국립극장 등 이른바 '빅3' 공연장은 좋은 공연을 기획하라는 명목으로 매년 국가로부터 수십억 대의 공연예산을 받고 있지만 기획력 부족등으로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나재암 서울시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세종문화회관이 지난해에 서울시로부터 받은 공연사업예산은 97억9000만원. 이 중 48%에 불과한 46억 9400만원만 썼다. 올해 공연예산도 지난달까지 44%인 39억7900만원이 집행됐다. 2003년부터 작년까지 미 집행된 세종문화회관의 공연예산은 169억700만원.

예술의전당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박찬숙 의원(한나라당)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예술의 전당은 매년 13억~23억원에 이르는 공연예산을 미 집행했다. 쓰지 않고 남은 공연 예산 중 7억여 원은 서초구청에서 발부한 건물 및 토지에 대한 취득세로 쓰였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예정됐던 해외팀의 내한공연이 갑자기 취소될 경우 수억~수 십 억 원의 공연 예산이 남는 경우가 있다"며 "남은 공연 예산의 일부가 취득세 등으로 쓰인 것은 문화관광부의 승인 등 적법한 절차를 밟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쉽게 벌고, 실적 올리고

"예술의전당 재정자립도는 너무 높습니다. 예술성과 공익성을 강화하려면 재정자립도를 낮춰야 합니다."

5월 취임한 신현택 예술의전당 사장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이색적으로 재정자립도를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예술의 전당 재정자립도는 70~80%선. 해외 유명 국공립공연장은 40%정도다.

좋은 공연을 기획해 관객을 많이 불러 모아 재정자립도를 높였다면 칭찬받을 일이지만, 국내 주요 공연장들은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기획공연은 줄이는 반면 대관료나 주차료 인상 등 손쉬운 방법으로 재정자립도를 높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실제로 빅3 공연장의 기획 공연 비율은 20% 미만. 해마다 기획 예산은 남는 반면 대관료 수입은 목표치를 넘긴다.

세종문화회관의 경우 2004년 재정자립도가 23.3%에서 지난해 30.3%로 올랐다. 같은 기간 공연예산 집행율은 해마다 감소한 반면 대관 수입은 130%로 목표치를 초과 달성했다.

대관 역시 '돈 되는' 뮤지컬 위주로 이뤄진다. 국립극장은 올 초 브로드웨이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 내한공연이 거의 두 달 간 이어졌고 여름엔 뮤지컬 '캣츠' 내한공연이 두 달 간 장기 공연됐다. 내년 초에는 상업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가 두 달 동안 공연될 예정이다.

국립극단을 비롯 국립국악관현악단, 국립무용단 등 나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순수예술단체가 상주하는 국립극장이 우리 문화를 이끌 기획 공연 대신 상업 뮤지컬의 해외 내한 공연으로 1년에 서너달 씩 공연장을 채워 '국립'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다.

이에 대해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국공립극장은 국민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고 예술가들이 창작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어야 한다"며 "국공립 공연장이 이윤을 남기려는데 급급한 현 상황은 본분을 망각한 처사"라며 비판했다.

유성운기자 polaris@donga.com

■ 빅3 대관료 수준은

예술의전당 회당 380만원 세종문화회관은 600만원

공연장이 수익성을 위해 눈독을 들이는 부분은 대관사업. 공연 기획처럼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극장, 서울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등 '빅3' 공연장의 경우 독과점이나 다름없다. 서울시내에 객석이 2000~3000석이 넘는 대극장을 갖춘 곳은 이 세 곳 밖에 없어 대작을 공연하려는 기획사들은 이 곳을 못 잡아 안달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업고 최근 5년간 '빅 3' 공연장은 기세는 등등하다.

예술의전당의 경우 올해 공연장 대관료(뮤지컬 기준)는 회당 380만원으로 예술의 전당 2년 전에 비해 21%(80만원)이나 올랐다. 2000년 대관료(215만원)와 비교하면 176%가 치솟은 셈이다. 예술의 전당은 내년에도 다시 5% 더 인상할 계획이다.

예술의전당의 경우 올해 대관료(뮤지컬 기준)는 회당 380만원. 예술의 전당 1회 대관료는 2년 전에 비해 21%(80만원)이나 올랐고 2000년 대관료(215만원)와 비교하면 176%가 치솟았다. 한 뮤지컬 제작자는 "공연장 대관료만 380만원일 뿐 심지어 로비 사용료도 따로 받고 분장실 이용료, 조명 사용료 등 꼭 쓸 수밖에 없는 부대시설 요금을 별도로 책정하고 있어 실제로는 하루에 1000만원에 가깝다"고 말했다. 예술의 전당은 내년에 대관료를 5% 인상할 계획이다.

세종문화회관도 사정은 비슷해 최소 대관료는 회당 600만원(뮤지컬 기준). 2회 공연을 하는 주말의 경우 대관료만 하루에 1200만원이 넘는 셈이다.

대관료는 티켓가격의 상승으로도 이어진다. 뮤지컬 기획사들은 "거의 2년 주기로 대관료가 오르지만 서울은 2000~3000석 규모 대극장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대관료를 올려주고 대신 티켓 가격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연장은 "스타 기용 등 배우 몸값의 문제지 대관료는 전체 제작비의 10%도 안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 뮤지컬 기획사 관계자는 "비싼 대관료도 문제지만, 공연장들은 대관료는 대관료대로 챙기고 '대관투자'라는 명목으로 수익의 일정 지분까지 요구한다"며 "국공립 공연장들은 빈 극장을 빌려주고 가만히 앉아 돈버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이 벌어들인 대관료는 47억1600만원. 연초 목표액이었던 36억 2200만원을 130% 가볍게 넘겼다. 2005년에도 역시 목표액의 189%를 '초과 달성'했다.

유성운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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