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Focus]엽기 노벨상으로 불리는 ‘이그 노벨상’

  • 입력 2007년 10월 1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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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이그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국인 권혁호 씨(왼쪽)가 만든 향기 나는 정장을 입고 직접 문질러 보고 있다. 사진 제공 권혁호 씨
1999년 이그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국인 권혁호 씨(왼쪽)가 만든 향기 나는 정장을 입고 직접 문질러 보고 있다. 사진 제공 권혁호 씨
4일 저녁(현지 시간) 미국 하버드대에서 열린 이그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 로버트 러플린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왼쪽에서 두번째)가 올해 의학상을 수상한 댄 메이어 씨가 칼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사진 제공 AIR
4일 저녁(현지 시간) 미국 하버드대에서 열린 이그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 로버트 러플린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왼쪽에서 두번째)가 올해 의학상을 수상한 댄 메이어 씨가 칼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사진 제공 AIR
해마다 노벨상 시상 시즌이 되면 으레 열리는 행사가 있다. ‘엽기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이그(Ig)노벨상 시상식이다. 미국 과학계의 딴지일보인 ‘기발한 연구연보(AIR)’가 1991년 제정한 상으로 ‘흉내 낼 수 없고, 흉내 내서도 안 되는’ 기발한 연구에 주어진다. 수상작은 대부분 전문 학술지에 실린 것으로, 보는 이의 폭소를 자아내지만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연구들이다.

수상자의 심사와 선정은 실제 노벨상 수상자들이 맡는다. 올해는 ‘항공상’을 새로 제정해 총 10개 부문을 시상했다. 4일 저녁(현지 시간) 미국 하버드대 샌더스홀에서는 왕년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올해 이그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199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을 지낸 로버트 러플린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올해 이 엽기 노벨상의 평화상은 동성애를 유발해 적을 무력화하는 ‘비밀 병기’를 개발 중인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이그노벨상 선정위원회는 동성 간에 극단적 연애 감정을 유발하는 ‘게이 폭탄(Gay Bomb)’을 개발 중인 미 공군 라이트연구소를 올해의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날 선정위원회 측은 “미 공군 라이트연구소가 1994년부터 적 병사들을 서로 성적으로 끌리게 해 사기와 전투력을 떨어뜨리는 연구를 해 온 공로가 높이 평가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 연구소가 개발 중인 ‘아프로디시악’이란 물질은 인체에 유해하지 않으면서 동성애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 연구소는 해충이 병사들만 물게 하거나 병사들에게서 끔찍한 입 냄새를 유발해 병사들이 서로 혐오하게 만드는 ‘엽기 무기’도 개발 중이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이 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쥐를 만들어 의학 발전에 공헌한 과학자에게 돌아간 것과 비교해 이 엽기 노벨상 의학상 수상자들의 상상력은 발칙하다. 영국 글로스터 왕립의료원의 브라이언 위트컴 박사와 미국의 칼 삼키기 묘기자 댄 메이어 씨는 사람이 긴 칼을 삼켰을 때 일어나는 현상과 부작용을 공동 연구한 공로가 인정됐다.

두 사람은 X선을 이용해 칼이 생각보다 깊숙이 사람 몸속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들은 또 칼 삼키기 묘기자들이 식도염 증상과 유사한 ‘검도염’이란 목 통증을 앓는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4일 열린 시상식에서 메이어 씨는 청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삼키는 시범을 보였다. 이는 인터넷으로 생중계됐다.

올해는 항공 분야가 처음으로 포함됐다. 첫 수상의 영예는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로 ‘제트래그(Jet Lag·시차로 인한 피로)’ 치료법을 제시한 과학자들이 안았다. 아르헨티나 킬메스대 연구팀은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가 생활 리듬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생체리듬이 망가진 햄스터에게 소량의 비아그라를 주입한 결과 피로가 해소됐다는 것. 이 연구는 실제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도 소개됐다.

미국 코넬대에서 식품마케팅을 가르치는 브라이언 원싱크 교수는 ‘시각 심리’를 비만 연구에 적용한 공로로 올해 영양학상을 받았다. 원싱크 교수는 바닥이 뚫린 수프 그릇을 이용해 눈에 보이는 음식량이 사람의 식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수프 그릇 밑에 구멍을 뚫고 튜브를 꽂아 수프를 계속 공급하면 끊임없이 먹게 된다는 것 그는 “그릇의 바닥이 보이지 않으면 70%가량 음식을 더 많이 섭취한다”고 했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 이그노벨상(Ig Nobel Prize)은::

미국의 과학 잡지 ‘기발한 연구연보(AIR·Annals of Improbable Research)’ 발행인 마크 에이브러햄스 씨가 과학계의 엄숙주의를 비판하며 1991년 제정했다. 매년 기발한 연구를 선정해 노벨상 발표 시기에 맞춰 시상한다. 노벨 앞에 ‘이그(Ig)’라는 글자가 붙어 ‘형편없는(Ignoble)’이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다. 수상자는 자비로 상을 받으러 가야 하며 상금은 한 푼도 없다. 1999년 한국도 향기 나는 정장을 개발한 공로로 첫 수상자를 배출했다.

▼‘향기 나는 정장’ 한국인도 수상▼

한국은 자연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튀는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하는 이그노벨상에서는 수상자를 배출했다.

1999년 한국인 최초로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권혁호(39) FnC코오롱 차장이 주인공. 당시 입사 4년차였던 권 씨는 향기 나는 정장을 개발한 공로로 환경보호상을 받았다. 권 씨가 만든 정장은 문지르면 상큼한 냄새가 난다. 대학에서 염색공학을 공부한 그는 은사인 임용진 경북대 교수 아래서 향기를 내뿜는 캡슐 기술을 연구했다.

권 씨는 “술과 담배에 찌든 남성들도 이 옷만 입으면 가족에게 환영받고 결국 가정의 평화와 환경을 지킬 수 있을 것이란 점을 심사위원들이 높이 산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CNN을 포함한 주요 언론들도 권 씨의 기술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실제 시상식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권 씨가 만든 정장을 입고 나와 옷을 직접 문지르는 시범을 보였다.

엽기 연구라고는 하지만 이그노벨상 수상작 중에는 이처럼 산업과 관련된 경우가 종종 눈에 띈다.

2002년 물리학상은 맥주 거품을 연구한 독일 루트비히막시밀리안대의 물리학자 아른트 라이케 교수가 받았다. 라이케 교수는 맥주 거품이 점차 감소하는 시간을 연구해 거품의 반감기가 컵 모양이 아니라 맥주 종류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2004년 화학상 수상자는 코카콜라사 영국 공장이었다. 이 회사는 영국 템스 강물을 미국항공우주국(NASA) 기술을 동원해 완벽하게 정화시켰다며 생수 ‘다사니’를 출시했다. 그러나 이 생수가 수돗물을 정수한 것이며 발암물질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망신을 샀다.

같은 해 가라오케를 처음 발명한 일본의 이노우에 다이스케(井上大佑) 씨가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노우에 씨는 ‘가라오케를 통해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인내심을 키울 수 있게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10개 부문 올해의 수상작▼

○의학상 브라이언 위트컴(영국 글로스터 왕립의료원) 댄 메이어(미국 칼 삼키기 묘기자) ‘칼 삼키기와 그것의 부작용 연구’

○물리학상 라크슈미나라야난 마하데반(미국 하버드대) 엔리케 세르다 비야블랑카(칠레 산티아고대) ‘종이의 구겨짐 연구’

○생물학상 요하나 반 브론스베이크(네덜란드 에인트호번공대) ‘침대에 사는 벌레와 해충 박테리아 연구’

○화학상 야마모토 마유(일본 국제의료센터) ‘쇠똥으로 바닐라 맛 내기’

○언어학 후안 마누엘 토로, 조세프 트로발론, 누리아 세바스티안 가예스(이상 스페인 바르셀로나대) ‘일본어와 네덜란드어를 거꾸로 읽을 때의 쥐 이해력 연구’

○문학상 글렌다 브라운(호주) ‘알파벳 순서로 물건을 배치할 때 영어 정관사 더(the)가 일으키는 혼란 연구’

○평화상 미국 공군 라이트연구소 ‘적군 병사들을 서로 유혹하게 하는 게이폭탄 연구’

○영양학상 브라이언 원싱크(미국 코넬대) ‘바닥이 안 보이는 수프 그릇을 이용한 인간의 무한한 식욕 연구’

○경제학상 궈정셰(대만) ‘은행 날치기범을 잡는 그물 발사기 개발’

○항공학상 파트리시아 아고스티노, 산티아고 플라노, 디에고 골롬베크(이상 아르헨티나 킬메스대) ‘햄스터와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를 이용한 제트래그(Jet lag·시차로 인한 피로) 치료법 개발’

▼올 노벨물리학상 파킨 박사 왜 빠졌지?▼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노벨상을 놓친 불운한 천재 과학자들도 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알베르 페르 교수와 페터 그륀베르크 교수의 연구를 확산시킨 미국 IBM 알마덴 연구소의 스튜어트 파킨(사진) 박사가 대표적인 예. 파킨 박사는 1988년 페르 교수와 그륀베르크 교수가 규명한 얇은 막에서의 ‘거대자기저항(GMR)’ 효과를 이용해 대용량 하드디스크를 개발했다. 두 수상자가 처음 연구 결과를 내놨을 때만 해도 아무도 이들의 연구가 훗날 과학과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일찌감치 파악한 파킨 박사는 1997년 GMR 효과를 이용한 대용량 하드디스크를 개발해 자칫 사장될 뻔한 연구가 다시 주목받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파킨 박사의 연구는 현재 보급되고 있는 모든 컴퓨터에서 활용되고 있다.

평소 파킨 박사와 친분이 두터운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물리학과 신성철 교수는 “두 수상자의 연구가 이렇게 빨리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진 데는 파킨 박사의 공이 가장 크다”며 “그가 올해 수상에서 제외된 데는 미국에서 활동 중인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유럽의 텃세가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100여 년에 걸친 노벨상 역사상 파킨 박사와 유사한 사례는 종종 발견된다. 오스트리아의 여류 물리학자였던 리제 마이트너는 독일 화학자 오토 한과 함께 원자폭탄 원리인 핵분열의 발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1944년 화학상 수상자 명단에 그녀의 이름은 빠진 채 오토 한만 올라갔다. 1967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여학생이던 조셀린 벨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중성자별인 ‘펄서’를 처음으로 발견했지만 1974년 노벨 물리학상은 스승 앤터니 휴이시 교수에게 돌아갔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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