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주영의 그림 읽기]서울에서 파리까지 기차로 가기

  • 입력 2007년 9월 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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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는 남쪽 지방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까지 너무 오래 갇혀 살아 지리적 감각이 퇴화되어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는 자주 보았지만 기차는 그림책에서만 몇 번 보았을 뿐입니다.

소년이 자라나서 청년이 되었을 때 문득 이런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역 창구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는 열차의 탑승권을 살 수는 없을까. 그는 방 한구석에 있던 세계지도를 꺼내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정말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았던 일을 지도는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파리 사이에는 기차여행을 방해할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습니다. 서울을 떠난 열차는 평양과 신의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어지면서 거미줄같이 얽혀 있는 철길을 따라 손쉽게 러시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서쪽의 유럽 도시로 가는 대륙횡단 열차로 갈아타기만 하면, 며칠 후에는 기적과도 같이 파리역에 도착하겠지요. 그 사이는 비행기나 선박으로 옮겨 탈 걱정 없는, 오직 육로 위의 철길로만 이어져 있을 뿐입니다.

러시아 대륙을 거쳐 유럽에 닿는 횡단열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열차는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을 오랫동안 달려가기 때문에 비좁은 객차간의 승객에겐 단조로운 일과가 지루하고 피곤하게 반복되겠지요.

그때쯤 열차는 화창한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들판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관사는 예정에도 없었던 그곳에 열차를 정차시킵니다. 승객들은 환성을 지르며 밖으로 내달아 풀밭 위를 뒹굴며 햇살을 쬐거나, 대평원에 일렁이는 바람을 양껏 마시며 휴식을 취합니다.

어느덧 승무원의 호루라기 소리에 따라 승객들은 다시 열차에 오릅니다. 지평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열차의 창문에는 꺾어서 빈 병에 꽂은 야생화로 가득가득 장식되어 마치 들꽃열차가 석양을 마주하며 달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퀴퀴한 땀 냄새와 시큼한 음식 냄새가 진동하던 객차간은 어느새 새큼한 꽃향기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대륙횡단열차가 구성하는 그 현란한 낭만은, 기차를 볼 수 없었던 산골에서 태어나 자란 소년에겐 늙어서도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주영 작가

◇ ‘그림읽기’는 오늘자부터 작가 김주영 씨가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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