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조윤선 변호사의 ‘예술 오아시스’ 화가 김병종

  • 입력 2007년 7월 1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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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서울대에 다녀왔다. 졸업을 앞둔 후배 여대생들과 선배로서의 경험담을 나누는 자리였다. 20년 만에 모처럼 모교에 가는 날, 시간 내서 산책도 하고, 점심시간 동안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가 지은 미술관에도 가고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 올랐다.

모교…. 10여 년을 서울시내에 있는 사무실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때론 창밖 너머로, 때론 식사 길에 만난 경복궁, 삼청동 가로수 정도에도 감동했던 나는 갑자기 시야를 가득 메우는 초록에 그만 경탄하고 말았다. 굳이 이름 있는 건축가의 작품이 아니어도 좋았다. 수십 채에 이르는 똑같이 생긴 콘크리트 건물이 아닌, 제각각의 형상을 한 다채로운 건물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20여 년 만에 보는 모교는 멋진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문득 학교에 와 있으면서도 학교가 몹시 그리워졌다.》

어느날 ‘바보예수’가 왔다… 황폐한 영혼에 ‘생명’을 부어 주었다

대학 시절, 2학년이 되면 전공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에 있어서 2학년은 너무나 착잡한 학년이었다. 소위 전공 필수 수업이 시작되는 2학년 1학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지원했던 학과에 대한 탐색, 실망, 번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갑자기 눈앞이 막막하고 힘이 빠졌다.

그런 때에, 나를 구원했던 건 바로 월요일 첫 수업과 금요일 마지막 수업시간을 차지했던 김병종 교수의 수업 ‘미술의 이해’였다. 비전공자를 위한 예술교양 강좌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같이 듣는 친구 하나 없었지만 그의 강의는 남다른 감동이었다. 동양미술을 전공한 그의 육성을 타고 고미술 작품들은 살아 움직였다. 학창 시절에 시험 준비를 위해서만 외우던, 귀에는 익었지만 눈에는 설었던 그림들이 내 곁에 다시 태어난 듯했다. 남들보다 한 해 일찍 학교에 들어간 나는 대학 2학년이 되었어도 만 스무 살도 채 안 된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오래된 그림을 얘기하는 그의 수업이 좋았다. 나 자신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미래가 내다보이지 않는 답답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 주일을 그의 수업으로 시작하고 또 마친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 되었다. 그렇게 그의 수업은 마치 오아시스처럼 나의 10대의 마지막 순간을 적셔 주었다.

변호사가 되면서 나는 치열하게 살기로 결심했고, 맘먹은 대로 살았다. 유학을 떠나기 전 6년 동안, 내가 읽었던 책은 고작 전공서적 아니면 어학서적뿐이었고, 어쩌다 아이를 재우면서 함께 보던 디즈니 만화영화 비디오가 내가 보는 영화의 전부였다. 그런 시절, 내가 어떻게 그의 책 ‘화첩기행’을 사게 되었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지만,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내 영혼은 비로소 그의 책으로 인해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격무에 지쳐 새벽에 귀가하곤 했지만, 나는 잠자리에 들면서 ‘화첩기행’을 펴 들었다. 단숨에 읽어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하룻밤에 한 꼭지씩 아껴 가면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화첩기행’ 2권이 곧 나왔고, 나는 출판된 지 보름도 채 안 되어 그 책을 샀다. 사회인이 된 나에게 그의 책은 더욱 풍성한 오아시스였다. 마치 바싹 마른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학창시절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처절한 목마름을 앓고 난 후였기에 더욱더 값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라 해야 할지, 화가라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의 재주는 끝이 없다. 그의 글과 그림은 그만큼 다채롭지만 그를 돋보이게 하는 건 진솔함이다. 글에서나 그림에서 그는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그를 더욱 빛나게 하는 건 글과 그림에 녹아 있는, 세상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이다. 생명을 잃을 뻔한 사고를 겪은 후 비로소 트였다고 하는 따뜻한 시선은, 사실 그런 일을 겪지 않았어도 숨길 수 없었던 그가 지닌 본래의 따스한 성품, 바로 그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서구의 화가 그 누구도 표현해 낼 수 없었던 처연한 피에타, ‘모자상’을 그려냈으면서도 애정 어린 필치의 동자승과 아기 부처에선 스스로의 벽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대가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연작 ‘바보 예수’에서는 흡사 등신불과 같이 삶의 고통을 짊어진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예수는 신이 아니었다. 타인의 짐을 대신 걸머진 우리들의 아버지, 투박하지만 따뜻하고 큰 손으로 언제라도 우리의 등을 두드려 주는 가장의 모습이었다. 사고를 당하면서 그는 생명에 대해 눈떴다. 이전의 그가 예수를 그저 바라보는 처지였다면, 그 이후의 그는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듯하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누구든 간에 서로 어우러져 지내는 세상. 그래서 해가 갈수록 그의 화폭은 점점 더 많은 생명을 보듬어 안았다.

줄곧 애잔하고 담담했던 그의 그림이 바뀌었다. 쿠바를 시작으로 남미를 구석구석 여행하면서 한 편의 로드 무비같이 쏟아 낸 그림을 보면, 그의 말대로 ‘금욕적인 수묵화 동네에서 온 그에게 사방에서 달려드는 원색의 야만은 속수무책’이었나 보다. 이전의 그가 경건한 생명을 그렸다면 모세혈관 구석구석 남미의 공기를 호흡한 그는 이제 역동적인 생명을 토해 내고 있다. 라틴기행에서 엮어 낸 그의 그림에서는 그렇게 전에 없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충만하다. 마티스가, 들라크루아가 아프리카를, 중동을 유럽에 선사했듯 그 역시 낯설지만 강렬한 남미의 성찬을 우리에게 차려 내고 있다.

올해로 그가 ‘바보 예수’를 세상에 선보인 지 꼭 20년이 된다. ‘바보 예수’로 화가 김병종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그는 ‘생명 이야기’와 더불어 자라 왔다. 한 가지 화법에 천착하고, 이름을 내자마자 안주하는 화가는 너무 많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거장이란 예외 없이 그 창작의 폭과 깊이로 결정되는 법이다. 앞으로 10년, 20년 후 우리가 피카소나 들라크루아의 방대한 작품과 그 끝 모를 예술세계에 탄복하듯, 나는 그가 일생 동안 그린 작품 앞에서 역시 머리를 조아리고 싶다.

조윤선 변호사

■“조 변호사가 내 수업 들었다고요?”

뗌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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