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길, 걷다가 예술을 만났다

  • 입력 2007년 6월 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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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선 가끔 볼 수 있는 마임 공연. 시민들은 신기해하면서 편안한 웃음을 짓는다. 원대연 기자
청계천에선 가끔 볼 수 있는 마임 공연. 시민들은 신기해하면서 편안한 웃음을 짓는다. 원대연 기자
실내공연은 적당한 긴장을 필요로 한다. 반면 거리공연은 약간 흐트러져도 좋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미소. 공연에 대한 삯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원대연 기자
실내공연은 적당한 긴장을 필요로 한다. 반면 거리공연은 약간 흐트러져도 좋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미소. 공연에 대한 삯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원대연 기자
“자, 이리 와 보렴.” 즉석공연은 정해진 플롯이 없다. 관객 반응을 통해 거리와 호흡한다. 관객은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예술가 카롤레이 씨의 즉석 공연. 과천=정양환 기자
“자, 이리 와 보렴.” 즉석공연은 정해진 플롯이 없다. 관객 반응을 통해 거리와 호흡한다. 관객은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예술가 카롤레이 씨의 즉석 공연. 과천=정양환 기자
“네가 극장에 찾아오지 않는다면 공연이 너에게 찾아가리”

(프랑스의 거리극 종사자로 구성된 로슈 포럼 자료집 서문 중에서)

지금 동전을 몇 닢이나 갖고 있나요.

거리를 걷다보면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곤 합니다. 문득 딸랑거리는 동전이 잡힙니다. 딱히 필요는 없는데…. 살짝 귀찮기도 하지만 왠지 유용하게 쓰고 싶습니다.

물론 쓸모는 많습니다. 돼지 저금통에 저금하는 것도 좋죠. 커피전문점에 비치된 제3세계 어린이 돕기 모금함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자동판매기 커피를 뽑아 직장 동료와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잠깐 바깥으로 나가 보는 건 어떨까요. 퇴근길이라면 조금만 천천히 걸어보세요. 어디선가 음악이 들리지 않나요. 독특한 복장으로 마임을 하는 예술가도 있습니다.

도시엔 생각보다 거리공연이 많습니다. 한 번도 못 봤다고요? 공연은 펼쳐졌는데 그냥 지나쳤는지도 모릅니다. 일이 바쁘고 삶이 고달프다는 핑계로 공연을 즐길 여유조차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언제나 주머니에 있지만 뇌리에서 잊혀진 동전처럼 말이죠.

동전도, 마음의 여유도 찾았다면 다시 한 번 나서 봅시다. 서울 청계천도 좋고 한강도 괜찮습니다. 가까운 동네 공원이나 지하철역도 있습니다. 서투른 아마추어 예술가라도 마음만 열면 거장의 공연만큼 즐겁습니다. 이번 주말 주머니 속에서 딸랑거리는 동전을 거리공연 모금함에 넣어보면 어떨까요. 서늘한 초저녁 바람처럼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도시의 쉼표 거리예술, 대중과 즉석에서 통하는 맛

-도시 생활의 활력소 거리공연

[청계천]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청계천.

청계천은 겉과 속이 다르다. 시끄럽고 매캐한 도심은 겉살일 뿐 상큼한 속살을 숨기고 있다. 한 계단만 내려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발걸음부터 다르다. 종종걸음이 없다. 커피를 들고 넥타이도 살짝 풀었다. 물장구 치는 아이들은 어디서 왔는지. 치마를 걷고 물가에 발을 담근 10대 소녀들. 물비린내가 나지만 그것마저 편안하다.

최근 청계천 근처에선 거리공연이 자주 열린다. 피아노거리나 마로니에공원까지 포함하면 주말엔 20개가 넘을 때도 있다. 아마추어 연주만 떠올리면 곤란하다. 마임이나 국악은 물론 수준 높은 한국무용도 감상할 수 있다.

오후 4시 무렵 광통교 부근에선 ‘Two윤 팬플루트 앙상블’이란 공연이 펼쳐졌다. 40대로 보이는 여성 연주가 2명이 팬플루트를 불었다. ‘타이타닉’처럼 대중적인 음악부터 귀에는 익숙하지만 제목은 모르는 곡까지. 은은한 팬플루트의 선율에 작은 감동이 일어난다.

낯섬이 익숙함으로 바뀔 무렵, 작은 변화가 생겼다. 힐끗거리면서 지나치던 사람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춘다. 그런데 빙 둘러싸진 않는다. 등을 돌리고 물가에 앉는다. 강 건너 마주앉은 사람도 공연을 보진 않았다. 그저 강바람을 즐기면서 귀로 음악을 따라갈 뿐이다.

중학생 김경희 양은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딱히 공연을 찍는 건 아니다. 공연을 배경으로 자신과 친구들을 찍는다. 한참을 깔깔거리더니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기도 한다.

“격식이 있는 공연장이 아니잖아요. 청계천에 산책 나왔다가 우연히 본 거니까 공연을 감상하기보다는 분위기를 즐기는 거죠. 음악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서 좋은 거고요.”

연주했던 윤명화 씨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내공연이라면 이런 산만함은 불편하죠. 그러나 모두가 함께하는 거니까 자연스럽습니다. 사람들이 ‘아, 저게 팬플루트구나’ 하고 알아주면 더 바랄 게 없지요. 거리공연은 거리와 그 거리를 찾는 사람과의 소통이니까요.”

공연이 끝날 즈음, 엄마에게 등을 떼밀린 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쭈뼛쭈뼛 한참을 망설이더니 모금함에 돈을 넣는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 공연을 향한 박수일까, 아이를 위한 격려일까. 뭐라도 상관없는 것. 그게 거리공연이다.

[과천 야외무대]

토요일인 지난달 26일엔 경기 과천시의 시민회관 야외무대를 찾았다. 오후 7시경 이곳에서 열리는 과천토요예술무대를 보기 위해서였다. 과천은 수도권에서 색다른 도시 중 하나다. 다양한 무료 거리공연이 수시로 펼쳐진다. 햇수로 벌써 11년째. 시민들도 거리공연에 익숙하다.

오후 5시 중앙공원 인근. 마침 독특한 공연이 열렸다. 이탈리아에서 온 예술가의 마임 공연이다. 마르코 카롤레이 씨는 오후 8시의 무대공연에 정식으로 초청받은 거리예술가. 일정에 없었지만 주최 측 부탁을 받고 흔쾌히 놀이마당을 벌였다. 그는 “대중과의 즉흥적인 교감이야말로 거리공연의 묘미”라며 기대에 부풀었다.

쉽지는 않았다. 과천 사람들이 거리공연에 익숙하다지만 상대는 벽안의 중년 남성. 신기한 듯 바라보지만 선뜻 다가서진 않는다. 카롤레이 씨가 접근하자 뒷걸음질치는 사람도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마임인가 봐” 하는 정도다.

오히려 아이들이 용감하다. 갖가지 상상의 물건도 금방 알아본다. 함께 줄넘기하고 함께 박수친다. 악수한 뒤 끌려가는 척하자 힘센 척 반응하는 것도 꼬마아이다. 소통에 벽이 없기 때문이다.

카롤레이 씨는 유럽에서도 상당한 지명도를 가진 배우다. 이탈리아에선 TV에도 출연하는 그는 거리공연 기획자이기도 하다. 올해로 거리공연 25년째. 세계의 다양한 거리축제를 두루 섭렵했다. 돈을 내도 아깝지 않은 양질의 공연을 시민들은 몰라본 셈이다.

“거리공연은 미묘하다. 360도 무대에서 관객의 반응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리감이 없어 반응이 그대로 전달된다. 관객이 무심하면 공연자도 힘이 빠진다.”

오후 8시의 정식공연 땐 분위기가 달랐다. 관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연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카롤레이 씨가 손을 이끌자 무대로 나서는 어른 관객들도 많았다. 마임 오케스트라 연주에선 춤도 췄다. 공연자는 “200% 만족한다”며 즐거워했다.

“아까의 대답을 바꿔야겠다. 한국은 매력적이다. 이런 뜨거운 반응은 어디서도 쉽지 않다. 다만 아직은 무대와 관객이란 ‘거리’에 익숙한 것 같다. 유럽과 일본의 중간쯤이랄까. 열정과 수줍음이 공존한다. 물론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하지만 거리공연에선 ‘한발 앞으로’가 중요하다. 거리공연의 주체는 공연자가 아니라 관객이기 때문이다.”

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거리는 사람 자연 예술이 교감하는 무대-‘경계 없는 예술센터’ 대표 이화원 교수

거리공연은 누구나 편하게 다가설 수 있지만 정치사회적인 함의가 가득한 무대이기도 하다. ‘극장과 장르, 국경을 넘어서는 원초적인 예술’이라는 평가도 있다.

상명대 공연학부의 이화원(사진) 교수는 오래전부터 국내 거리예술 활성화에 힘써 왔다. 거리극 연구 창작단체 ‘경계 없는 예술센터(ASF)’의 대표인 그는 29일부터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제 시장거리에서 열리는 ‘2007 경계 없는 예술 프로젝트@문래동’의 총기획도 맡고 있다.

이 교수에게 거리공연의 역사와 의미 등에 대해 들어 봤다.

―거리예술이란 무엇인가.

“거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퍼포먼스와 예술 활동을 총칭한다. 유럽에선 1970년대부터 광범위한 문화현상으로 전개됐다.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은 거리예술의 1세대다. 권위와 제도에 도전하던 힘이 거리예술의 바탕이 됐다. 여기서 ‘거리’란 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공간이자 소외된 이들의 집합 장소다. 거리예술 역시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국내 거리예술의 역사는 어떤가.

“한국은 서구의 연극 양식과 극장 건축, 제도가 도입돼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내 극장의 공연은 아쉽게도 대중과 교감하는 데 한계가 있다. 서구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 전통의 연희문화 원형을 돌아봐야 한다. 마당극은 서구의 거리극과도 맞닿아 있다. 미약하지만 거리극은 인간을 다시 문화의 중심에 놓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거리예술을 즐기는 시민들에게 당부한다면….

“거리예술은 인접 예술 장르까지 포괄하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거리예술은 콘크리트와 먼지, 스트레스가 가득한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삶의 본원적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예술의 교감을 회복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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