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명인 황병기 ‘달하 노피곰’으로 13년만에 독주집

  • 입력 2007년 5월 29일 20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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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명인 황병기(71)는 전통의 파괴자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곡은 한국의 전통음악으로 대접받는다. 그의 음악은 한국 전통음악의 어휘를 초월하지만 언제나 한국적이다. 결코 타협하지 않는 한국적 섬세함이 담겨 있지만 세계의 청중들에게도 크게 어필한다.

영국 쉐필드대 음악학 교수인 앤드루 킬릭은 최근 황병기의 음악에 대해 '패러독스(모순)에 대한 명상(Meditation on a Paradox)'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1962년 국내 최초의 현대 가야금 독주곡 '숲'을 작곡하고, 1975년 전위예술을 표방한 '미궁'을 작곡한 그의 음악은 '모순'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창조와 파괴, 현대와 고전, 동양과 서양 중 어느 한 쪽 시각만으로는 그의 음악세계가 잘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13년 만에 독주집 '달하 노피곰'을 내놓았다. '침향무' '비단길' '미궁' '춘설'에 이은 5번째 앨범이다. '달하 노피곰'은 현존하는 백제 유일의 가요인 '정읍사(井邑詞)'를 가야금곡으로 만든 것이다.

○ 전통음악을 깨기 위해 고대(古代)로 돌아간다

이번 앨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곡은 '하마단'이다. 신라의 고대 음악을 상상해 만든 '침향무'(1집), 서역문화를 교류했던 통로인 '비단길'(2집)에 이어 이번엔 페르시아의 고대도시 '하마단'을 가야금으로 표현했다. 그의 실크로드 3부작의 대단원인 셈이다.

"신라를 비롯해 삼국시대 고대국가 문화가 꽃을 피웠던 것은 서역과의 교류에 있었어요. 처음 신라인들에게 작곡의뢰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인도 불교의 향기가 그득한 '침향무'를 작곡했지요. 신라인의 마음은 비단길처럼 아름다웠을 겁니다."

그는 전통음악이 조선시대 후기의 음악에만 머물러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전통음악의 틀을 깨긴 해야겠는데, 섣불리 깨기만 하면 허물어지기 쉽다"며 거꾸로 조선음악의 뿌리를 찾아 신라, 가야, 백제로 거슬러 올라갔다. 현대 퓨전 국악인들이 서양의 클래식, 대중음악에서 영감을 찾는 것과 다른 길이었다.

그는 실크로드를 여행한 적도, 하마단이란 도시를 가본 적도 없다. 그는 "바흐는 평생 독일을 벗어나지 않았어도 이탈리아, 프랑스 모음곡을 썼다"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하마단이란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그 정신세계"라고 말한다.

○ 초스피드 시대의 정신적 해독제

이번 앨범은 다음달 1일 발매된다. 1999년 서울대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고 나서 작곡한 '시계탑'은 소녀풍의 맑고 깨끗한 곡이며, 깊은 산 속에 홀로 사는 도인이 읊조리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거문고곡 '낙도음(樂道吟)'은 탈속의 경지를 헤아리게 한다. 또한 대금을 트럼펫처럼 입술을 떨면서 연주하는 '자시'(子時)는 아방가르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고향의 달', '차향이제', '추천사' 같은 성악곡도 이채롭다. 그는 이번에 녹음할 때 가야금 밑에 단지를 놓고 연주했다. 전자적인 효과보다는 자연스러운 공명을 통해 여음을 살리기 위해서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부산피난 시절 가야금을 처음 접한 그는 경기고 서울법대를 졸업했지만 평생 국악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이달 말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초청음악회를 비롯해 보스턴, 뉴욕 등 순회공연을 갖는다. 미국에서 그의 음악은 "초스피드 시대의 정신적 해독제"(스테레오 리뷰)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는 "누구나 여행을 가면 좋은 호텔보다,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며 "우리 음악도 서양 것을 흉내 내기보다는 어디에도 없는 음악을 창조하고 연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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