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원의 펄프픽션]버드나무와 결혼한 사무라이? 요사스러운!

  • 입력 2007년 4월 2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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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이나 괴담의 원형이 가장 많다고 알려진 나라는 동양에서는 단연 일본, 서양에서는 영국이다. 가령 21세기에 영화나 게임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캐릭터는 영국산, 800만 요괴와 이를 쫓는 음양사 캐릭터는 일본산이다. 공교롭게도 두 나라 모두 섬이다. 예로부터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달리 나아갈 곳이 없는 섬에는 기이한 이야기들이 세월과 함께 축적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유독 제주도에 구비신화나 서사무가가 가장 많이 분포해 있다.

한편 두 나라 모두 동서양에서 각각 최초로 산업혁명과 기술혁명의 과정을 겪었다. 현실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달 속도가 인간을 압도할 때 인간은 상상 속에서는 반대로 비과학적이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갈망하게 된다. 정보화 바람이 거센 21세기, 우리가 또다시 온갖 귀신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괴담(怪談)’은 라프카디오 헌(1850∼1904)의 눈에 비친 근대 일본의, 말 그대로 ‘괴담’을 모아놓은 아시아 환상문학의 전형이다. 일찍이 최치원 설화나 금오신화 등을 보유한 우리에게 사실 일본식 괴담은 그리 낯설지 않다. 죽어서 나무가 된 유모, 귀신도 울고 갈 만큼 비파 실력이 좋은 호이치, 사랑하는 임을 못 잊어 환생한 여인 오테이, 설녀라는 눈귀신과 결혼한 나무꾼, 구운몽의 성진처럼 꿈속에서 인간의 온갖 희로애락을 경험한 아키노스케, 여자로 변신한 버드나무와 결혼한 사무라이 등 모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옛날 얘기’들이다. 다만 수컷의 죽음에 너무 슬퍼하다가 제 부리로 배를 찢어 죽은 원앙, 꽃이 피는 것을 보기 위해 벚나무 아래에서 배를 가르는 사무라이 등 빈번히 등장하는 할복 모티브는 일본 특유의 것이라 할 만하다.

문명과 자연, 지상과 천상을 명확하게 가르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라프카디오 헌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일본의 환상문학은 분명 낯설고도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서사무가인 ‘바리데기’의 경우도 서천서역 무간지옥은 ‘걸어서’ 당도할 수 있는 수평적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동물계와 식물계, 산 자와 죽은 자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아시아의 환상문학은 분명 경계 해체를 지향하는 21세기형 영화나 게임에서 각광받는 상상력의 보고이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의 말처럼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현재와 전혀 다른 모습과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인간과 자연, 산 자와 죽은 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교감하던 그 ‘젊은 시절’을, 21세기 디지털 첨단 사회에서 그리워해 본다.

한혜원 계원조형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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