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박성우/‘도원경(桃源境)’

  • 입력 2007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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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에 다녀온 며느리가 밥상을 내온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가시지 않던 더위

막 끓여낸 조갯국 냄새가 시원하게 식혀

낸다

툇마루로 나앉은 노인이 숟가락을 든다

남은 밥과 숭늉을 국그릇에 담은 노인이

주춤주춤 마루를 내려선다 그 그릇 들고

신발의 반도 안 되는 보폭으로 걸음을 뗀다

화단에 닿은 노인이 손자에게 밥을 먹이듯

밥 한 숟갈씩 떠서 나무들에게 먹인다

느릿느릿 빨간 함지 쪽으로 향하던 노인이

파란 바가지 찰랑이게 물을 떠다가

식사 끝낸 나무들에게 기울여준다

손으로 땅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는 노인,

부축하고 온 지팡이가 다시 앞장을 선다

어슬렁어슬렁 기어온

고양이 한 마리가 나무 밑동으로 스며든다

툇마루로 돌아와 앉은 노인이 예끼, 웃는다

- 시집 ‘가뜬한 잠’(창비) 중에서》

도원경이라면, 동진 때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유래한 동양적 이상향이 아니던가. 삶이 팍팍할수록 무릉도원을 꿈꾸지 않은 이 누가 있을 것인가. 시제에 가슴 부풀어 연마다 행마다 뒤져 보았지만 흐드러진 복사꽃은 고사하고 낙화 한 잎 보이지 않는다. 외려 ‘뻘’과 ‘더위’와 ‘주춤주춤’과 ‘신발의 반도 안 되는 보폭’만 도드라질 뿐이다. 그런데도 속은 느낌은커녕 ‘참으로 도원일세!’ 고개가 끄떡여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복사꽃 핀다고 다 무릉이 아니듯, 도원이 지리부도에 나오지 않는 까닭을 새삼 알겠네.

-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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