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세상공부에 바쳤죠”… 서임 1주년 정진석 추기경

  • 입력 2007년 3월 23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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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률 기자
석동률 기자
죽음에 직면했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은 그 섬뜩한 순간을 내면 속에 깊이 간직한 채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생사의 경계마저 뛰어넘어 종교적으로 승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이는 내면의 상처(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24일로 추기경 서임 1주년을 맞는 정진석(76) 추기경은 전자의 경우다. 6·25전쟁 피란길. 눈길에 쓰러져 잠자다 죽을 뻔했던 사연, 얼어붙은 남한강을 건너다 얼음이 깨져 물속으로 사라졌던 한 무리의 사람들, 앞서가다 지뢰를 밟아 한꺼번에 폭사했던 사람들…. 바로 한 치 곁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공학도가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도 정 추기경은 그때의 생생했던 기억과 항시 동행하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진솔하고 겸손했다.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위치를 언제든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1시간여의 인터뷰 동안 정 추기경은 ‘분수’ ‘과분’이란 단어를 10여 차례 썼다.

“제가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과분하지요. 분수를 많이 생각해요. 내 분수가 이런 것인데 괜히 분수 넘게 욕심 부리면 파멸의 길로 가지요. ”

정 추기경은 요즘 서임 1년차로서 힘겨운 관문을 통과하고 있다. 로마교황청에서 보내 주는 ‘숙제’가 만만찮아 보인다. “청주교구장으로 청주에서만 28년을 살았어요. 서울로 오니 자연히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어요. 추기경이 되니 교황님의 고문이 돼서 동아시아 문제를 포함해 견해를 물어올 경우가 많습니다. 근데 너무 모르는 게 많아요. 내가 능력 부족이구나. 다른 민족의 문화도, 경제적 조건도 모르고…. 평소 공부 좀 더 할 걸 이런 생각을 해요.”

정 추기경은 ‘공부벌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가톨릭 내 석학으로 꼽힌다. 저서와 번역서만 45권이다. 그런데 공부가 부족하다니….

“지난 1년 이슬람에 대해 공부를 안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어요. 수니, 시아파 역사를 연구하는 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민족도 다 다르고 얽히고설켜서. 교황청에서 같은 동아시아라고 베트남 역사에 대해 질문하는데…. 어쩌겠어요. 사람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

교회법과 교리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지만 ‘세상의 논리’를 공부하면서 인간적으로 좌절감도 느낀 듯하다.

정 추기경이 세속적 현실에 대해 가급적 발언을 자제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분야에 대해) 생각하는 정치인이나 경제인을 제가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제 분수를 아는 것이죠.” 하지만 그는 생명윤리와 같이 교회가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야만큼은 누구보다 분명하고 단호하다.

정 추기경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특성은 매우 낙천적이라는 것. 몇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그는 자신을 하느님에게 맡겼다. 그리고 하느님이 자신을 언제 거둘지 모른다는 자세로 살았다. “오늘 내 삶이 끝날 수도 있다, 오늘 하루밖에 못 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한 것이지요.” 그래서 월드컵 축구경기도 제대로 시청한 적이 없다. 1분 1초가 아깝다고 했다.

낙천적이다 보니 생각이 여유롭다. 집착이 없으니 내려놓기가 가능하다. 가톨릭의 급속한 교세 성장세와 관련해 기자가 “기왕이면 1등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손사래를 친다. “1등 해야 한다는 생각은 욕심입니다. 신앙의 선택은 양심의 자유입니다. 한국민은 종교의 진수를 아는 민족입니다. 갈등이 없지 않지만 다종교 국가로서 우리처럼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상대를 용납 못하면 결국 피를 흘리게 되지요.”

서울대교구장과 추기경이라는 바쁜 일과 속에서도 정 추기경이 가장 우선시하는 행사는 교구 소속 성직자들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직접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일이다. “자식을 성직자로 만드는 것은 부모 처지에선 상상할 수 없는 희생입니다.” 그러니까 정 추기경에게는 장례미사 집전이 어버이들의 희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해당한다.

“어린아이를 만나면 느낌이 어떠신가요. 손자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는 “물론 그렇지요. 친손자에 대한 감정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아마 그런 것일 겁니다. 자녀에 대해선 잘 모르겠는데 손자에 대해서는 달라요. 아마 사랑도 격세유전되는 모양입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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