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픈 웃음 걷고 심각해진 무대… 정치-사회 비판극 쏟아져

  • 입력 2007년 3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 유신시대 고발부터 현실정치 풍자까지

“난 늙은 놈들이 싫어요. 새로운 것에 대해 늙은이들은 설명을 듣기도 전에 머리부터 흔들죠. 새것이 옛것보다 좋은 게 하나도 없다니, 늙은이들은 아주 보수 꼴통이에요. 나이가 많을수록 지독하고, 돈이 많을수록 악랄하고, 지위가 높을수록 오만해요!”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어. 이 세상은 우리가 인생을 바쳐 만든 거예요. 젊은 놈들은 세상을 위해 뭘 했죠? 아무것도 안 한 젊은 놈들이 깨끗한 척, 순수한 척, 우리를 추악하다 비난하는 거요! 우리가 세상 떠나면 모든 건 젊은 놈들이 차지할 텐데 성미 급한 놈들은 당장 내놓아라, 난리를 쳐!”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같다고? 사실 이 대화는 국립극단이 22일 막을 올리는 ‘황색여관’의 한 토막이다. 가난한 노동자와 대학생이 묵는 허름한 1층과 돈 많은 기득권층이 거주하는 호화판 2층으로 나뉜 황색여관은 마치 ‘양극화’된 오늘날의 한국을 상징하는 것 같다. 황색여관의 탐욕스러운 주인 부부는 1, 2층 투숙객을 가리지 않고 금품을 긁어모으고, 현 주인으로부터 여관 운영권을 넘겨받으려는 처제와 주방장의 갈등도 곁들여진다.

정치의 계절이 공연계에도 찾아온 걸까?

가벼운 코미디 일색이던 연극계에 모처럼 정치극을 비롯해 사회비판적 작품들이 잇따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황색여관처럼 풍부한 은유와 웃음으로 현실을 꼬집은 작품부터 유신시절의 정치극까지 다양하다.

27년 만에 다시 무대로 돌아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9년 초연돼 큰 인기를 모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의 검열로 개막한 지 얼마 안 돼 공연금지됐던 작품. 초연 때 연출가인 채윤일 씨가 예전에 삭제됐던 부분까지 되살려 무대에 올렸다.

다음 달 1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막이 오르는 아서 밀러의 ‘시련’은 묵직한 정치극. 정권이 저지른 불법 처형과 이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 박정희 정권하에서 올려질 예정이었지만 공연 직전 10·26사태가 터지면서 빛을 보지 못한 공연이다. 전두환 정부 시절에도 이 작품의 공연을 추진했으나 역시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번 공연은 초연을 추진했던 연출가 윤호진 씨가 맡아 근 30년 만에 숙원을 풀게 됐다.

연출가 겸 극작가 이윤택 씨는 올해 10월 노무현 대통령을 풍자한 정치극 ‘정말 부조리하군’을 공연한다. 또 문화미래포럼도 6월 북핵 문제를 다룬 연극 ‘그라운드 제로’를 공연할 예정이다.

● 뮤지컬 ‘화성에서…’ 대선후보 초청 대선마케팅

‘대선의 해’를 겨냥한 공연계의 ‘대선 마케팅’도 눈에 띈다.

개혁을 꿈꾸던 정조를 다룬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는 대선을 홍보에 적극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제작 발표회 때부터 “대선 후보들이 꼭 봐야 할 작품이자 정조는 우리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상”임을 강조한 이 뮤지컬은 홍보 문구도 ‘누가 이 시대의 정조를 꿈꾸는가’로 정했다. 제작사 측은 15일 첫 공연에 대선 후보를 모두 초청했으나 현재 손학규 전 경기지사만이 참석 의사를 밝힌 상태라고 전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군부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6년 초연된 사회풍자극 ‘칠수와 만수’도 오랜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2007년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됐다. 두 페인트공이 고층 건물에 올라갔다가 실수로 페인트 통을 떨어뜨려 12중 교통사고를 유발하며 빚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 이번 공연에서는 이들이 떨어뜨린 페인트 통을 지나가던 대선 후보가 맞아 병원에 실려 가게 되는 것으로 ‘시의성’을 살렸다.

연극평론가 김윤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는 “사회적인 예술인 연극은 결국 모두 정치극인 셈”이라며 “최근 연극의 사회성을 회복하려는 중진 연극인들의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