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발견하는 보드리야르의 유산

  • 입력 2007년 3월 13일 17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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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타계한 쟝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프랑스 사상가였다. 그는 소비사회로 대표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징후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이를 잠언적 문구로 표현했다.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승'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급진적이었다. 우리의 삶이 진짜가 아닌 가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그의 통찰은 플라톤 이래 수많은 현자들을 통해 수없이 반복된 메시지였다. 보드리야르는 이를 극단으로 밀어붙였을 뿐이다.

문제는 이를 전달하는 그의 어조에서 과거 철학자들의 우려와 통탄이 빠져있다는 점이었다. 허구 보단 진실, 물질 보단 정신을 우위에 두었던 학계의 전통에서 이는 '이단'의 징후였다. 어쩌면 그의 글이 난해한 이유도 그런 학계의 시선을 의식해서일지 모른다. "실재가 이미지와 기호의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는 유명한 문구는 바로 그의 표현이다. 그러나 학계보다 현실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는 '일상의 철학자'였다. 우리의 일상 속에 남겨진 그의 유산을 찾아보자.

●영화 '매트릭스' 속 시뮬라시옹

'매트릭스'의 초반부 해커로 살아가는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자신을 찾아온 고객을 위해 불법 소프트웨어를 숨겨뒀던 책을 꺼내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1981년)이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이 없는 복제품 또는 원본에서 해방돼 원본보다 더 현실적 존재가 된 인공물을 뜻한다. 그것은 허구면서 동시에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점에서 초과실재(하이퍼리얼리티)다. 그 대표적 사례가 어린이를 위한 꿈동산 디즈니랜드와 어른들을 위한 환상공간 라스베가스다. 두 장소는 철저한 상상과 가상의 산물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간이기도 하다. 시뮬라시옹은 바로 그런 가상현실과 초과실재가 실재보다 우월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바로 네오가 실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매트릭스의 세계다.

●컬덕트(Culduct) 속에 숨은 '기호의 소비'

문화(culture)와 제품(product)의 합성어로서 문화융합상품을 뜻하는 컬덕트의 유행은 고전적 정치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루이뷔통 가방을 걸치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된장녀'들에게 상품은 단순히 사용가치나 교환가치가 아니다. 브랜드가 지닌 상징을 소비하는 것이다. 코카콜라는 음료가 아니라 젊음을 팔고, 나이키는 운동화가 아니라 스포츠정신을 판다. 바로 '소비의 사회'(1970년)'이후 보드리야르가 줄기차게 주장한 '기호의 소비'다. 기호는 스스로 의미를 창출할 수 없다. 대신, 기호가 지시하는 사물을 통해서 아니면 다른 기호와 차별을 통해 의미를 창출한다. 시뮬라시옹이 강화될수록 전자는 약화되고 후자는 강화된다. 그리하여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신도 자연도 아닌 기호의 체계, 바로 '코드'가 된다.

●CNN뉴스가 가져온 '실재의 소멸'

보드리야르는 1991년 '이라크전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글을 통해 CNN 뉴스를 통해 중계되는 이라크전쟁은 실제의 전투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초과실재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초과실재는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를 대체하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 가. 이라크전에 대한 정보와 뉴스가 넘쳐나면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한 '전쟁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뉴스는 실제의 사건을 따라가기 보다는 이 전쟁 시나리오에 부합하는 사실들을 보도한다. 물론 그 시뮬라시옹의 세계에도 예측할 수 없는 돌발변수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9·11테러. 실재의 과잉이 결국 실재의 소멸을 낳는다는 그의 통찰은 북핵 위기에도 적용된다. 위기에 대한 과잉정보가 '위기는 없다'는 실제적 무감각을 낳고 있지 않은가.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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